영화를 본 후 좋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대략 두 가지다. 인물이 매력적인 경우, 그 다음 공간이 매력적인 경우. 마지막으로 이야기 자체가 좋은 경우도 있는데 인물, 공간이 좋으면 이야기는 왠만하면 별 문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대사와 장면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경우는 뭘 보긴 봤는데 인물도 공간도 별로라 기억이 알아서 희미해지는 경우다. 시각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별 볼일 없는 것까지 일일이 기억 하며 사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니까.
<파워 오브 도그>는 드물게 인물도 공간도 좋았던 영화. 개의 힘이라니, 제목 의미도 궁금하고 묘한 분위기의 포스터도 궁금했지만 왠지 유튜브나 사전 검색 없이 봐야 할 것 같아서 식구들 모두 잠든 늦은 밤 다락방에서 혼자 넷플릭스를 켰다. 브로크백 마운틴 느낌의 퀴어물인가? 아니면 형제와 한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삼각관계? 셜록홈즈 컴버배치가 카우보이라니 미스 캐스팅인데... 기타 등등의 쓸데없는 생각 속에 영화가 시작되었고 대략 20분이 흐르자 예상했던 영화가 아님을 알았다. 감성과 이성이 교차되는, 거칠지만 섬세한.... 공존하기 쉽지 않은, 대비되는 요소들의 느낌과 분위기가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인물간의 복잡한 마음을 풍경과 공간의 힘으로 친절하게 덧칠하는 감독의 재능이라니. 세상일이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진짜 중요한건 언제나 그렇듯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름답고 서늘한 서스펜스 드라마였다.
시공간 배경은 1920년대 미국 몬태나인데 촬영지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고향 뉴질랜드의 센트럴 오타고 지역이다. 원작의 현실적 재현 보다 감독 자신이 상상하는 저택 이미지, 그리고 잘 어울리는 풍경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원작의 공간들 역시 그만큼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는 반증도 된다. 감독 입장에서는 인물을 묘사하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건축가처럼 목장이 들어설 대지를 물색하고 풍광에 대비되는 저택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내부 공간은 더 섬세한 음영을 조절하기 위해 실내 셋트로 만들어 영상을 찍었다.
광활한 초원 구릉지와 고독하고 억센 산맥이 교차되어 펼쳐지는 풍광 속에 버려진 고목 등걸 같은 버벵크 형제의 저택이 있다. 거친 활력의 밝은 바깥과 대비되는 짙은 어둠의 저택은 주인공 필 버벵크의 복잡한 심정처럼 닫혀있는 어둠과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집이다. 종종 영화에서 집과 공간은 주인공의 내면과 극의 주제를 비유하는 기재로 작동하는데 <파워 오브 도그>의 저택만큼 극의 중요한 동력으로 건축물이 교묘하게 사용된 예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검갈색 스테인을 잔뜩 발라놓은 집의 표면은 흙먼지 날리는 땅의 질감과 유사한 느낌이라 마치 땅과 집이 하나로 연결된 유적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벽면 넓이에 비해 창이 작다보니 저택 의 입면은 사람 사는 살림집이 아니라 성곽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탈색된 낡은 과거 시대에 대한 은유랄까 저물어가는 서부 시대의 종말처럼 읽혀지길 바랬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필 버벵크의 어둡고 불안한 인생사를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고.
집 내부는 마치 창이 없는 공간처럼 빛이 통제되는 어둑한 밤갈색 색조 탓에 공간 전체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다. 오가는 동선에는 별도의 조명이 없어서 대사를 말하는 인물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실내 장면들이 주로 인물의 뒷모습과 옆모습, 그림자를 쫒는 터라 무척 갑갑한 느낌이 드는데 그 느낌이 필 버벵크의 실제 마음이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집 밖에서 터프함 그 자체인 상남자 필 버벵크는 집 안에선 어둠의 은둔자처럼 빛 없는 공간에서 피곤한 눈빛으로 살아간다.
매사를 공간과 건축의 문제로 엮어서 생각 하는게 직업병이다 보니 극 후반부 무너져가는 필버벵크의 불쌍한 인생이 안쓰러웠다. 최소한 침실 벽 마감이라도 밝고 환한 스타일로 바꾸고 시원한 바깥 풍경 조망이 가능한 수평창 하나라도 바꿔 달았다면 스스로 자초한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어둡고 답답한 집에서 살면 될 일도 안 되고 사람 마음은 병이 든다. 물론 공간 하나가 삶 전체를 지배하진 않겠지만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이란 없다. 누군가의 삶을 담는 집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인생에 이런 저런 힘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허무한 필의 죽음에 마음이 동요된 까닭에 영화 끝나고 필 버벵크가 바랬던 집은 뭘까 생각해봤다. 그는 인내심이 대단한 남자였고 흠모하는 멘토 브롱코 헨리로부터 인생이란 역경과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참고 견디기만 하는 삶은 겉은 멀쩡해도 속이 곪기 마련이다. 육체는 피폐해지고 정신은 심약해지고 결국 삶의 균형은 깨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집은 인내와 극복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둡고 불길한 집을 그는 참고 인내하며 견디며 살았다. 스위트한 마이 홈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꿈 꿨더라면 그에겐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필과 피터가 함께 산을 보는 장면이었다. 필은 브롱코 헨리를 언급하며 피터에게 물었다. “산에서 그가 뭘 봤는지 보여?” 피터가 답한다. “짖는 개가 보여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개”
개의 입 속 같은 집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삶을 살던 필이 없어진 후 그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생이란, 장애물을 계속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믿고 사는 피터라면 인생의 장애물 같은 불길한 집을 그대로 두진 않았을 텐데. 궁금하다. 남은 세 사람의 집은 어떤 모습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