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집
산책하는 집... 에 대해 늘 생각한다. 아파트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단독건물이라면 산책로를 만들 수 있다. 설계를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지어진 집을 상상해보는 방법이 있다.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빈 땅을 서성이며 어떤 집을 지을까 생각해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을 따라간다.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앞, 현관문 근처에 서면 반대편에 주차공간이 있고 그 뒤엔 높지 않은 담이 있고 담 너머에 마당이 있다. 담으로 다가가 마당을 슬쩍 살펴본다. 연갈색 데크가 깔려있는 마당 끝엔 피로티 구조물 아래의 야외 키친이 마련되어있다. 따뜻한 봄날엔 저기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술한잔해도 좋겠구나 싶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더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기자기한 집의 바깥 공간을 살펴본 다음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현관은 꽤 넓다. 여유로운 수납장과 화장실을 지나 중문을 열면 거실이고 몇 개단 오르면 식당과 주방이다. 1층은 벽 없는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시원한 층고와 마당 방향으로 막힘없는 시야를 갖췄다. 실제 면적은 크지 않지만 이런식으로 공간을 구성하면 체감하는 면적은 좁다는 느낌이 전혀 없을 것 같다.
벽에 붙어 1자로 죽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간다. 높은 천정과 하얀 벽과 좋은 채광이 어우러지는 2층은 예쁜 갤러리 같은 분위기다. 1층에서 올라온 계단이 끝나는 곳은 현관에서 가장 먼 곳이다. 현관으로부터 출발해서 집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슬슬 걷고 오르고 한 셈이다. 잔잔한 산책의 여정은 다시 다시 반대편 끝으로 연결된다. 1층이 내려다보이는 여유로운 길을 따라 천천히 반대편으로 걷는다. 은은한 볕이 떨어지는 천창 아래 널찍하고 시원한 큰 벽엔 100호 사이즈의 큰 그림 하나 걸려도 좋겠다.
길 끝엔 계단식 테라스가 이어진다. 실내에서 바깥으로, 다시 집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하이라이트다. 봄날 저녁 무렵에 시원한 캔 맥주 하나 들고 맨발로 나가 계단을 툭툭 밟고 루프탑에 오른다. 마침 멋진 노을이 서쪽 하늘을 보라색으로 물들인다...
집 안에 길을 만들면 공간은 풍요로워진다. 모든 건축가들이 단독주택 설계에 모두 나 같은 생각을 하는건 아니겠지만 난 이 가설을 믿고 언제나 잘해보려고 노력한다. 주택에서 길은 곧 공간이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걷기의 흐름은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고 그 장면은 거주자에게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간을 멈춰있는 정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길의 일부로 이해하는 편이다.
건축적 산책
(architectural promanade)
위대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주택을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 체험하는 공간 ' 으로 봤다. 사람이 건축물의 내부와 주변을 걸으며 점진적으로 변하는 공간을 체험하는 과정을 ' 건축적 산책(Architectural Promenade)' 이라 했다. 그는 건축가라면 마땅히 산책의 과정을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건축적 산책' 은 건축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공간과 길이 사용자에게 즐거움과 체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의미를 둔다.
건축적 산책 설계의 첫 순서는 일단 자연스럽게 긴 동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선이 길면 괜히 다리만 아프고 멀리 돌아가야 하니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까 고민도 된다. 기능적 관점으로 건축설계를 보면 동선 짧은 공간은 효율적이고 동선 긴 공간은 비효율적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작은 집을 넓은 집으로 느낄 수 있다면, 긴 동선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공간의 변화와 지루하지 않은 장면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면... 어떨까. 비슷비슷한 건물이 줄지어 서있는 삭막한 신도시의 가로를 걷는 것과 개성있는 작은 건물과 가게들이 곳곳에 있는 서촌의 골목길을 걷는 것이 전혀 다른 체험인 것처럼 말이다.
작은 주택을 이루는 공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 집과 옆집 윗집 아랫집이 똑같은 천정고를 갖고 쌓여있는 아파트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내 소유의 단독 건물이라면 그 속에 길을 내고 길 주변에 어떤 공간을 둘 건지를 결정할수 있다. 가령 천정 높이 변화만으로 각 공간의 깊이감을 달리할 수도 있고 유입되는 볕의 각도와 양, 그림자의 변화만으로도 길의 풍경은 달라진다. 연주가에서는 산책하는 사람 입장에서 시야가 열리고 닫히는 리듬, 각 장면의 프레임 전환을 통한... 산책하는 재미를 주고 싶었다. 집 속에 길 하나를 잘 포개놓으면 실내와 바깥, 층과 층 사이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설계된다.
르꼬르뷔제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1928-1931)는 이런 건축적 산책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독주택 사례다. 이 주택은 파리 인근 푸와시에 있는데 거주자가 집 안을 산책하면서 다양한 공간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빌라사보아 역시 입구 근처에서 여정이 시작된다. 1층은 주차와 차량 회전을 감안하여 필로티로 띄어져있고 현관만 땅에 연결되어있다. 현관에 들어서면 계단과 경사로가 있는데 둘중 하나를 선택해서 2층으로 오를 수 있다. 2층에 오르면 넓은 테라스와 벽 없이 하나의 큰 공간으로 설계된 넓은 거실과 식당이 거주자를 맞는다. 테라스는 탁 트인 조망과 하늘, 조경을 즐길 수 있고 옥상으로 오르는 경사로가 있다. 거주자는 자연과 조화된 공간을 즐기며 옥상으로 이동한다.
빌라사보아를 처음 갔던 건 건축을 막 배우던 20대 시절, 두 번째는 설익은 건축가 흉내를 내던 30대 후반 시절이었다. 그 집을 직접 걷고 산책하며 느꼈던 당시의 감각은 나의 어딘가에 남아서, 지금도 내가 설계하는 주택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산책의 즐거움을 투영하려고 한다. 건축적 산책은 주택 거주자에게는 단순한 살림집의 의미를 넘어 공간을 탐색하고 집의 기억을 다채롭게 만드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가볍게 거닐수 있으면좋겠다. 산책은 일상에 잔잔한 활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