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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narie Jul 26. 2023

어느 신부가 치른 공포의 숨바꼭질

<레디 오어 낫>, 불멸의 소돔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요하임 파티니르 작품 (목판 유화, 1520) ⓒ public domain


동틀 무렵, 아버지와 두 딸이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다. 그들이 떠나온 도성은 지금 유황불의 폭격을 받으며 불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절대 돌아보지 말고 뛰라는 천사의 경고를 어긴 아내는 그만 소금 기둥이 되었다. 아내이자 엄마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돌아볼 수 없는 가족은 지금 자신들이 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젯밤 아름다운 외모의 두 남자가 이 도시를 방문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성문 앞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두 남자를 보자 귀한 손님이라며 집으로 맞아 대접했다. 잠시 후 집 밖에 소란이 일고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도성에 사는 남자란 남자는 노소를 불문하여 다 집 앞에 와 있다.


"두 남자를 내놓으시오."

광야 유목민 출신으로 십수 년 전 여기 정착한 아버지는 손님을 내주면 벌어질 일을 훤히 알고 있다. 어떻게든 손님을 보호하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한 손님의 정체는 바로 신이 보낸 천사. 악명 높은 이 도시의 죄상을 보러 온 천사들은 도성의 타락을 목격하고 심판을 이행한다.


도시의 이름은 '소돔', 그리고 주인 남자의 이름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다. 비밀로 가득한 게임 재벌 '르 도마스' 가문을 흠모한 어느 가난한 신부의 끔찍한 신고식을 그린 영화 <레디 오어 낫>(2019)을 살핀 후 '롯'이 처한 비극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 대저택에서의 결혼식, 행복에 겨운 그레이스 ⓒ Fox Searchlight Pictures


행운의 이면에 도사리는 위험


'르 도마스' 가문의 후계자 알렉스와 혼인한 그레이스는 그동안 갈망하던 '가족'과 '재력'을 모두 갖게 되자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러나 이 로또 당첨에 가까운 행운의 이면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맷 베티넬리-올핀, 타일러 질렛 감독의 저예산 스릴러 영화 <레디 오어 낫>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는 단연코 '그레이스'를 연기한 배우 사마라 위빙이다. 


총을 든 신부 그레이스는 그동안 <메이헴> <사탄의 베이비시터>(2019) 등을 통해 다진 B급 호러 퀸 이미지의 연장전상이다. 특히 <사탄의 베이비시터>의 설정을 뒤집고 발효시킨 듯한 <레디 오어 낫>은 해가 이렇게 빨리 뜨나 싶을 정도로 깊은 몰입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보드게임 재벌인 르 도마스 가문의 4대손 알렉스는 어떤 이유인지 2년 동안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아왔었다. 그 2년간은 그레이스와 함께 한 삶이기도 했다. 알렉스는 그레이스만을 원했지만, 그레이스는 결혼을 통해 대가족의 일원이 되길, 그리고 르 도마스 제국에 입성하길 원했다. 결혼식이 열린 대저택, 알렉스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집에서 나가자는 말을 자꾸만 한다. 결혼식 직전에도, 마치 알람 시계의 경고음처럼 말한다.


'이대로 내 손을 잡고 집을 빠져나가면 돼. 그리고 다 잊고 살면 돼.'


알렉스의 경고를 웃어넘겼지만, 그레이스의 무의식만큼은 위험의 신호를 받고 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객들의 시선과 대놓고 평가를 주고받는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위축되지만, 그래도 단 한 사람 알렉스의 어머니 베키는 그레이스를 따듯하게 대한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통해 비천한 배경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을, 그리고 서로에게서 선한 마음과 함께 '강단'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레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주시하고 있는 헬렌 고모가 있다. 


▲ 'Hide and Seek' 카드를 보여주며 웃는 그레이스 ⓒ Fox Searchlight Picture


시월드 '공포의' 신고식


가문의 전통에 따라 게임 카드를 뽑게 된 그레이스. 그녀가 뽑은 카드가 'Hide and Seek'임이 드러나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가문의 일원이라면 이 게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이 카드를 뽑은 사람은 30년 전 헬렌 고모와 결혼했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신랑. 그 이후 들어온 새 식구들은 평범한 카드를 뽑아 싱거운 신고식을 치렀다.


그렇기에 알렉스도 설마 하며 그레이스를 데려왔을 터, 비록 뽑은 것은 그레이스지만 카드를 배정한 자는 따로 있다. 어느 날 알렉스의 4대조 할아버지에게 접근해 게임을 청하고, 이긴 그를 선택해 지금까지 부를 일궈준 가문의 은인 '르 베일'씨가 30년 만에 그레이스를 상대로 진짜 신고식을 명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그레이스는 무방비로 돌아다니다가 메이드 한 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레이스가 아님을 아까워하는 가족들을 보며 충격에 휩싸인다. 물론 모든 구성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 가족만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를 환멸 하는 대니얼과 알렉스는 그레이스를 탈출시키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물론 불우한 성장기가 벼려준 날 선 강단의 소유자 그레이스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활, 도끼, 총으로 중무장한 살인마들이지만, 이들이 목표물을 번번이 놓치는 동안 먼동이 터온다. 이제 이 무능한 악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온갖 무기로 중무장한 채 술래로 나선 르 도마스 가족들 ⓒ Fox Searchlight Pictures

 

이제 롯에게 돌아가 보자


아버지를 일찍 여읜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이주할 때 동행했으며, 삼촌이 섬기는 신 여호와를 섬겼고, 광야에서 유목하는 삶에도 동참했다. 긴 고생 끝에 축복으로 주어진 부유함은 오히려 목자들 간 분쟁으로 이어지고,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의 영역을 정해 갈라서게 된다.


이때 롯은 당시 가장 번화한 도시 소돔으로 향하는 의외의 선택을 하는데, 이는 롯이 본래 도시 태생이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안타깝게도 소돔은 화려하나 안전한 도시는 아니었다. 마을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하기는커녕, 탐하려고 폭도처럼 몰려올 정도라면, 평소 무슨 짓인들 못하리.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해, 폭도들에게 대신 딸을 내주겠다는 롯의 제안도 충격적이다.


사실 악행을 당한 자들의 원성이 크고 그 죄상이 심히 중대하기에 신의 심판은 예정되어 있었다. 천사의 도움으로 롯과 두 딸은 소알성으로 대피했다가 나중에 산으로 피신한다. 이후 롯이 산에서 겪게 될 참담한 사건은 사는 곳의 문화가 자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해 준다. 홍수 심판 후 노아의 가족에서도 그러했듯, 유황불 심판 후 롯의 가족에도 어김없이 죄악의 씨앗이 움튼다.


알렉스의 신부, 그레이스에게 '하이드 앤 시크' 카드가 배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악마의 사제 직분을 내던졌다가 돌아왔기에 신고식은 제대로 치러야 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바쳐야 하는 큰 신고식인 것이다. 신부 사냥에 실패하면 르 도마스 가문은 오늘 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이드 앤 시크'는 사제들을 조련하는 악마의 책략이었으리라. 죄악의 대가로 주어지는 번영, 그리고 번영의 대가로 청구되는 죄악의 톱니바퀴 속에서 끝없이 달리는 악인들.


폭력과 타락이 난무한 도시의 멸망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삶과 동떨어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해관계의 복잡함 때문에 선과 악의 경계가 매우 희미하다. 오늘의 사건사고 뉴스를 보다 보면 이곳이 문명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잔인한 범죄와 눈 뜨고 뺨 맞는 사기 사건이 넘쳐난다. 피해자들의 원성은 도시의 소음에 파묻히고, 심히 중대한 죄상일수록 법의 심판을 비껴간다. 소돔은 한날한시도 멸망하지 않았나 보다.


그레이스는 저택을 나와 어떻게 살아갈까. 그녀는 소돔을 사랑한 롯이기도 하고, 소돔을 끝장낸 두 천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르 베일이 친히 모습을 드러낸, 선택받은 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르 베일의 관심사는 그레이스였을지도 모른다. 타락하지 않은 강자만큼 악마의 호기심을 끄는 상대가 또 있을까. 인생이 탄탄대로라 느껴진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보라. 답이 없는 인생이 디폴트값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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