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놀고 뒹구는 백수 딸이 밥 하나 못챙겨먹을까봐, 엄마는 아침부터 마트에서 반찬을 바리바리 사들고 와 집에 두고는 다시 일하러 나가셨다. 오늘따라 별로 안 당기는 고기에, 처음보는 이상한 이름의 라면. 자주 먹던 것과 포장만 비슷한 두유는 급하게 사느라 헷갈린 것 같고, 잘 먹지도 않는 인스턴트 떡볶이는 최근에 내가 배달 떡볶이가 맛있다고 한 걸 듣고 사오셨나 보다.
차 끌고 마트까지 가서, 아까운 돈 주고 이런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산 것도 모자라, 아픈 어깨에 바리바리 지고 집까지 올려다 놓고서 딸한테 한소리 듣는 걸로 끝나는 이 아침 풍경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늘도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이러지 좀 말라고 실컷 짜증을 내뱉었지만 아마 며칠 뒤엔 또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겠지.
부담주지 말라는 딸에게 자꾸만 뭐라도 해주려는 엄마. 엄마 마음만 아프게 할 거 알면서도 계속 독설을 내뱉는 딸. 사람은 변하려고 해도 관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엄마의 관성이란 희생이다. 나는 한평생 엄마의 희생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희생하는 엄마와 그 자식의 관계란 매체에 나오는 바람직하고 건전한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부모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안에서 아이는 이 악물고 공부해 끝내 성공, 금의환향하여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두둑한 용돈을 쥐어주는 그런 결말을 예상한다면 지나친 이상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엄마의 희생에는 딱히 영양분이 없다. 죄책감이라는 맛을 베이스로 원망이라는 식감까지 느껴진다. 나를 낳지만 않았어도 180도 달라졌을 엄마의 인생을, 관성에 젖어버린 엄마 대신 늘 내가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런 죄책감만 있었다면 이 악물고 성공하는 클리셰가 나와줬겠지만 나는 그렇게 착하지도 유능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왜 주말에 편하게 놀러다니는 집안보다 매일매일 일하러 나가는 우리 집이 더 가난했냐고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같은 인생만은 살지 말라고 해놓고, 왜 내가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지원해주지 못했냐고, 왜 엄마는 열심히 살았는데 성공하지 못했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를 향한 원망이나 죄책감이 사실은 나 자신이 잘나지 못했다는 데에서 비롯된 왜곡된 분노라는 걸 깨닫게 될수록, 내 몸에 쌓인 엄마의 희생에 압도당했다. 엄마의 눈에서 더 이상 나에 대한 기대가 읽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내가 울고 있는 걸 애써 모르는 척하고는 나가서 혼자 울던 엄마를 봤을 때, 죄책감, 원망, 억울함, 불안감, 두려움, 후회... 모든 감정이 한데 엉켜 “왜, 왜, 왜”만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왜 나를 낳았으며 왜 희생했고 왜 기대하고 실망하고 왜 세상을 살게 했던 걸까.
엄마의 희생의 결과는 딸의 비출산 다짐이었다. 희생이 아니면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하는지 나는 배우지 못했다. 다만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좋은 기억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톡톡히 배웠다. 내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엄마이지만, 아이를 안 낳겠다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엄마이기도 하다.
아픈 어깨로 희생을 이고 왔으나 맛없다며 반기지 않는 못된 딸에게도 엄마는 관성적으로 계속해서 희생을 갖다 준다. 맛없어 보이는 라면과 함께 맛없어 보이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포장만 비슷한 맛없어 보이는 두유는 후식으로 먹었다. 의외로 다 맛있었다. 괜히 아침에 화낸 게 미안해서 맛있었다며 하트를 보내니 “치이~”라는 답장이 왔다. 답장을 읽는 순간, 약간의 행복감 속에 여전히 알싸한 맛의 무언가를 느꼈다. 순간순간의 달콤함으로 덮어버리고 살지만, 죄책감과 원망의 맛은 영원히 혀에 맴돌 것처럼 강렬하다. 일일이 써내려갈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기억들이 돌기 사이 사이에 끼어 빠지질 않는다. 나는 관성적으로 그 맛을 음미하고 또 음미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는 톨스토이의 명언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불행한 것 같다가도 약간은 기형적으로 행복한 것 같은 엄마와 나의 관계는 과연 행복일까 불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