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나이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스파이가 된 남자>

내 인생의 타이밍을 받아들이는 법

by 채수빈

이 드라마는 제목과 달리 첩보물은 아니다. 오히려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시트콤이다. 요즘 보기 드물게 무해하고 여운이 남는 작품 중 하나다.


나는 <스파이가 된 남자>의 제작자 마이크 슈어의 작품들을 모두 사랑한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미국판 <오피스>, <굿 플레이스> 등 ‘착하고 귀여운’ 느낌이 물씬 드는 작품을 내놓기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뻔뻔하지만 어쩐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사고는 많이 쳐도 애는 착해’라는 소리만 들었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다. 악역조차도 왠지 옆집에 사는 츤데레 아저씨 같거나, 차원이 남다른 멍청함 덕분에 그저 떼쓰는 아이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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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오른쪽 <굿 플레이스>


이 ‘무해함’은 마이크 슈어의 작품들을 모두 관통하는 코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결국 ‘좋은 삶은 무엇일까?’로 축약되는, 도덕적인 고민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오합지졸 지방 공무원들이 우당탕탕 사고를 쳐가면서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만들어가며 느낀 행복감, 얼떨결에 실수로 ‘굿 플레이스’에 도착한 이기적인 주인공이 인생의 의미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내린 결론으로 슈어는 답한다. 바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AAAABTD-S6TTMQ0DcMpWh3vOIYA1XjH0HwVwYQ07b9VtEgoP6-MXmOhEcS61Md783DXeKkYC9ivTyGFBZ1Hw1-uyU84_MdXgVnqVP_d7.jpg <스파이가 된 남자> 포스터


그의 가장 신작인 <스파이가 된 남자>도 마찬가지로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다만 그동안의 작품들처럼 어떻게 하면 오늘 더 나아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나에게 더 이상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생기는 막연함과 허무함을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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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교수였던 ‘찰스’는 은퇴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와의 사별 이후 삶이 그저 지루하다. 딸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지만 일상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하면 딸에게 스크랩해 보내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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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살펴보던 중 탐정사무소의 구인공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는다. 한 양로원에서 벌어진 도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스파이로 잠입하여 정보를 캐내올 시니어 스파이를 구하고 있었던 것. ‘스파이’가 된 찰스는 양로원에 입소하게 된다. 그는 양로원의 입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고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도난 사건을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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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정보원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는 괴팍하지만 정이 많은 주민들 사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이 까칠하고 툴툴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외로움으로 인한 공포다.


<스파이가 된 남자>는 나의 노년, 나의 부모님의 노년에 대해 계속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특히 나와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이 누굴지 상상하다 보면 숙연해진다. 나의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각자가 가진 인생의 타이밍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에 나와 함께할 사람들은 과거에는 달랐으나 노년에 와서 비슷한 인생의 타이밍을 지니게 될 낯선 이들일 확률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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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우정을 쉽게 쌓곤 한다. ‘누구’와 함께하는지보다 '함께하고 있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 온다. 인간관계 하나하나에 애쓰기보다, 주인공처럼 누구와도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행운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난날의 세월에 갇히게 된다. 암이 재발할 경우 언제가 나의 마지막 순간일지 모르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품위가 노년에는 돈보다도 더 귀한 자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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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그 품위를 지키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돈이 전제된다는 생각을 시청하는 내내 하게 된다. 극 중 실버타운 양로원 ‘퍼시픽 뷰’는 최소 4성급 호텔의 복지를 자랑하는 고급 시설이다. 주인공은 대학 교수였으며 몸이 매우 건강한 편에 속한다. 나의 아름다운 노후는 돈에서 출발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작품을 보는 끝까지 머릿속에 자리했다.


일단 어느 정도의 돈과 꾸준한 건강 관리로 품위를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하자. 그렇다면 지금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내가, 노년이 될 나를 위해 해줘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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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다. 바로 재미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부모님, 조부모님들은 옛날 경험담을 들려주고 싶어 하신다. 나의 할아버지도 모든 이야기 끝에 꼭 덧붙이신 말씀이 이것이었다. “재미있게 살아!” 후회 없이 재미있게 살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이 이 생의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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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바로 ‘나한테’ 재미있는 것. 사소한 장면이지만, 찰스가 친구 캘버트와 함께 금문교에 가서 조금 걷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라고 말한 후 곧바로 돌아가는 장면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금문교는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다. 이곳을 걷는 것이 캘버트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만큼 유명하고 당연한 것도, 나한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이상하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유연함’이다. 버킷리스트를 대충 즐긴 후 내 시간을 다른 곳에 쓰러 가는 가벼움의 지혜를 발휘하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기에.


IMG_3176.jpeg 제작자 마이크 슈어, 배우 테드 댄슨


<스파이가 된 남자>의 또 다른 매력은 테드 댄슨이다. <굿 플레이스>의 플레이스 설계자(architect) ‘마이클’로 분했던 테드 댄슨이 이번에도 주연을 맡았는데,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건축(architecture)을 가르치는 교수로 등장한다. 테드 댄슨은 80년대 인기 시트콤 <치어스>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미국의 국민스타다. 그는 작품 내내 말끔하게 빗어 넘긴 은발 머리와 댄디한 룩을 선보이는데, 패션 또한 나의 품위를 지켜주는 하나의 도구이자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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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가 된 남자>는 아카데미 상 후보에도 올랐던 다큐멘터리, <몰 에이전트(The Mole Agent)>를 원작으로 한다. 한국 제목은 <요양원 비밀요원>으로, 배경을 칠레로 하고 있다. 원작 다큐멘터리 역시 노화라는 문제에 대해 아름답고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다루었다는 높은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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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넷플릭스에서는 <스파이가 된 남자>를 시즌 2까지 시청할 수 있다. 시즌 1이 노화를 다뤘다면, 시즌 2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전하는 지혜에 주목한다.


인생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이야기 <스파이가 된 남자> 속 인용된 명대사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세상은 하나의 무대,

모든 남자와 여자는 그저 배우일 뿐

그들은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네.

한 사람은 그의 인생에서 여러 역할을 연기하고,

그의 행동은 일곱 단계로 나뉘네.


처음은 갓난아이,

간호사의 품에서 칭얼대고 토하며 시작하고

그다음은 책가방을 맨 채

빛나는 아침 얼굴로 학교에 가기 싫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투덜대는 학생의 시절이 오네.


그다음은 연인,

불타는 가슴으로 한숨짓고,

애인의 눈썹을 찬미하는

슬픈 발라드를 읊는 시절이 오고


그다음은 군인,

기이한 맹세를 하고, 표범처럼 수염을 기른 채

명예에 질투하며,

다투기를 서두르고 성급하며,

포탄 앞에서도

덧없는 명성을 추구하는 시절이 오네.


그다음은 판사,

속이 살찐 닭고기로 채워진 둥근 배에

엄숙한 눈빛과 단정한 수염을 가진,

현명한 격언과 시의적절한 사례로 가득 찬 모습으로

그의 역할을 다하네.


여섯 번째는 쇠약해진 늙은이로 바뀌고,

코에 안경을 쓰고 옆구리에 주머니를 단 채

젊은 날의 잘 보존된 스타킹은

이제 쭈글 해진 다리에는 너무 크고,

웅장했던 남성의 목소리는

다시 어린아이 같은 고음으로 바뀌어

휘파람처럼 새는 소리를 내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 기묘하고 파란만장한 역사의 끝은,

두 번째 어린아이 시절이자

완전한 망각으로 끝나네;

이빨도 없고, 눈도 없고, 맛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 Shakespeare, As You Like It (뜻대로 하세요)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도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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