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영화를 보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영화관을 가장 많이 찾았을 때는 고등학생 때다. 입시의 부담에서 허우적거리다 구명조끼를 발견한 듯, 극장에 갈 수 있을 때마다 망설임 없이 티켓을 끊었다. 당시에는 cgv에서 운영하는 '1318 클럽'이 있었다. 만 13세에서 만 18세의 청소년들에게 영화값을 할인해 주는 고마운 제도였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열심히 구로 cgv로 뛰어가 다른 세계에 몰입했다.
내가 주로 봤던 건 아트하우스 영화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어려운 영화들'은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조용했다. 낯선 세계에 잠입하는 설렘은 좋은 의미로 익숙해지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영화관에 있다가, 천천히 나오며 버스를 타고 창문을 열곤 했다. 바람을 느끼며 줄 이어폰을 꼽고,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했다. 밤하늘 밑 세상은 반짝반짝 소리 없이 빛났다.
<극장의 시간들>은 영화관에서 받았던 위로를 소환하는 시네 앤솔로지다.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의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극장과 영화에 감사함을 전한다. 씨네큐브가 개관 25주년을 맞아 제작했으며 영화 내내 배경으로 자리한다. 한 극장이 지켜본 영화와 관객의 모습들을 따라가다 보면, 극장과 오랜 포옹을 하는 느낌이다.
<극장의 시간들>은 세 단편 영화들을 모아 영화관 속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영화관 좌석에 앉는 것은 감독이었다가, 배우였다가, 관객이 된다. 특히 세 번째 영화, <를 보고 나면 관객은 저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극장 경험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도 공연처럼 고객 참여형이 될 수 있다는 증명이다.
세 번째 영화, <영화의 시간>은 아무도 없는 극장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극장을 관리하는 이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부러워했을 그들의 특권(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마음껏 영화 보기)을 비춰준다. 그다음 관객이 만나는 건 주인공 '영화'의 하루다. 땀이 비 오듯 오는 한여름, 영화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동창 '우연'을 우연히 만난다. 씨네큐브 근처 이화여고를 다녔던 그녀들이다. 다만 우연을 만난 영화의 표정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연은 영화를 반겨주며, 마치 정성스러운 한 끼를 대접하듯 영화 한 편 보고 가라는 말을 다정하게 건넨다.
시원한 영화관에서 주인공 영화는 꿈을 꾼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뭔가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녀가 잠든 사이 감독이 등장해 무대인사를 한다. 그의 말들은 마치 <극장의 시간들>을 보는 관객들에게 꼭 실시간으로 말하는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 영화도 있지만, 잠이 솔솔 오는 영화도 있다고. 때로는 영화가 마치 나를 밀어내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며, 관객이 느껴봤을 모든 감정을 인정해 준다. 관객을 꾸짖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잠들어도 괜찮다. 편히 꿈꾸고 쉬다 가면 된다.
<영화의 시간> 내내 주인공 영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도 꿈같아 보이는 그녀의 얼굴 속 고단함에 바쁘게 살아온 내 엄마가 생각나 내심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나도 그녀를 닮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극장의 시간과 지금의 내가 극장에 방문하는 것은 사뭇 달라졌다. 나는 고등학생 때 학교를 빠지고 영화관에 갔을 정도로 용감(?)하고 열정적이었다.
고등학생 때 영화가 선사하는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면, 지금 내게 영화는 하나의 휴식이다. 그러나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관에 굳이 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극장의 고요함이다. 영화 한 편을 굳이 시간 내어 극장에서 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극장의 시간들>은 극장에 갈 때 들었던 노래, 그날 있었던 일들이 다 합쳐져 극장만의 고유한 경험이 탄생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극장만이 주는 환대다.
10년 전 나는 극장의 환대를 사랑했던 것 같다. 상영관을 지켜주는 직원, 지류 티켓과 포스터가 나를 반겨줬다. 어느덧 '미소지기'는 서 있지 않고, 팝콘도 키오스크로 주문하며, 포스터와 티켓은 돈 주고 사는 굿즈로 전락했다. 심지어 좌석별로 가격이 달라졌다. 다시 관객을 모으기 위해 소장 가치가 있는 영화 굿즈, 단독 개봉, 리클라이너 좌석 등으로 극장 경험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가 눈에 보인다. 그렇지만 극장이 가지는 가장 고유한 가치는 따뜻한 환대일 것이다.
영화의 꿈속에서는 비를 피하여 달려온 어린 영화에 박수 쳐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곳에 잘 왔다고 말이다. 오늘도 극장은 당신이 어떤 상태로 왔든 환영해 줄 것이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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