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을 때 발명되는 역설 - 키리에

연극 <키리에> - 살리면 살아진다

by 채수빈

대부분의 인간은 살아가며 한 번쯤 신, 또는 그에 준하는 개념을 스치듯이라도 떠올리게 된다. 왜 나는 존재하지? 이 세계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지? 사후세계가 있을까? 이 질문들은 사실상 신에 대한 질문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은 초월적 존재를 향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 후, 그 답으로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역시 신이라는 개념을 한 번은 떠올려본 셈이다. 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은, 아예 떠올려본 적이 없다기보다는 깊게 탐구하지 않았다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에,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에 당도한다. 연극 <키리에>는 이 질문을 던져봤던 모든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작품이다.


[키리에] 2023 공연사진 1 ©국립정동극장.jpg


30대에 과로사한 천재 여성 건축가가 죽어서 '집'이 되었다는 설정으로 극은 시작한다. 관객은 이 '집'의 독백과 함께,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된다. 독일의 검은 숲 근처인 이 집에, 저마다의 사연을 안은 채 '끝'을 소망하는 인물들이 모여든다. 아픈 남편을 돌보는 전직 무용수, 연인과의 이별과 반려견의 죽음을 겪은 소설가, 종교적인 집안에서 희생을 배운 성직자,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교직원이 잠시 머무르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키리에] 2023 공연사진 2 ©국립정동극장.jpg


키리에라는 제목은 그리스어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의미의 '키리에 엘레이손'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도를 외쳐주는 것은 '집'이다. 집은 연극 초반에는 정글 같다가, 점점 조용한 숲 같다가, 아늑한 성당 같다가, 마지막엔 별이 빛나는 하늘 같다.


이 집에 오게 되는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하듯 자기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치유되어 숲을 빠져나간다. 이들을 지켜보는 '집'은 마치 인간들을 가만히 지켜봐 주는 신 같다. 특히 집에서 모두를 간호하던 무용수 '엠마'를 끝까지 걱정하는 집의 시선은, 관객도 집에게 사랑받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따뜻하다.


[키리에] 2023 공연사진 3 ©국립정동극장.jpg


'집'은 자기표현을 살아생전 못하던 사람이었고, 그녀는 죽은 후 한발 물러나서 모든 걸 지켜보게 된다. 그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어쩌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품어줄 수 있을까?'를 질문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무대에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 그림이 내내 배경으로 자리한다. 이 그림은 최초로 후광이 없는 예수를 그린,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예수를 그린 그림이다. 마치 이 그림처럼, <키리에>를 보고 나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 지금 인간이 서로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충분히 기적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키리에>를 보고 생각났던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이 있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없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인간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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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마치 <키리에>처럼, 극장이 공연을 조용히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에서 나는 종소리가 이따금 들리며, 아름다운 전망대를 보유한 정동극장 세실.


키리에는 3월 19일부터 4월 15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되며, 티켓 가격은 전석 3만 원이다. 서울 공연 후에는 4월 대전 지방 공연을 앞두고 있다.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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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공연이니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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