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면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영미권에서 가장 존경받는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여러 수많은 걸작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낭만적인 사랑을 가장 뜨겁게 찬미한 이야기는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서로 적대하는 몬태규와 캐퓰렛 가문의 두 젊은 연인이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치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주 익숙하다. 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영감이 되어주었고 영화화도 여러 차례 되었지만, 막상 무대에서 본 이들은 많이 없을 것 같다.
이 고전을 프랑스의 감성으로 뮤지컬화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2009년 초연 이후 17년 만에 한국 라이선스 공연으로 돌아온 <로미오와 줄리엣>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하면서 색달랐다.
영미 뮤지컬이 음악과 서사를 정교하게 배열한다면, 프랑스 뮤지컬은 감정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다. 배우들은 관객보다도 하늘을 향해 절규하듯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기 때문에 송스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위로 샹송 스타일의 리듬, 강렬한 안무가 결합되어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앙상블의 군무로 극의 팽팽한 긴장감을 내내 유지하는데, 그중에서도 ‘죽음’을 의인화해 등장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인물들 곁을 맴도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그 자체로 존재하여 극에 세련미를 더한다.
이렇듯 프랑스 뮤지컬의 폭발적인 면은 사랑과 증오라는 극단적인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기에 알맞았다.
두 가문의 갈등은 의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다 선명해진다. 몬태규 가문은 파란색 계열로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머큐시오를 필두로 한 그들의 모습에는 자신감과 충성심이 묻어난다. 반면 캐퓰렛 가문은 노출 있는 의상, 붉은색과 금색을 중심으로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두 가문의 의상은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로미오는 사랑만큼이나 ‘평화’를 갈망하는 소년이다. 그는 극 초반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예민하게 감지하며, 가문의 갈등을 사랑으로 끝내고 평온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반면 줄리엣은 수동적인 소녀가 아니다.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다소 소녀 같은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의 그녀는 죽음을 당당하게 선택하는 주체적인 사랑의 의지를 보여준다.
두 인물은 무척 다르지만 극이 고조될수록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히 연인을 넘어 첫사랑의 열기와 진심, 혼란을 공유하는 하나의 인물로 느껴진다. 가장 마지막에 죽는 인물인 줄리엣이 격정적으로 사랑을 외치는 대신 로미오를 보듬고 쓰다듬는 장면은 그녀가 비로소 로미오가 그토록 원했던 평화를 완성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1막보다 2막이 흥미롭다. 이야기를 진정으로 전개시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머큐시오가 티볼트에게 살해되고, 로미오가 분노로 티볼트를 죽이며 로미오가 추방된다. 모든 계획들이 공교롭게 어긋나며 인물들의 진면모가 보인다.
두 연인을 가로막는 어른들 또한 단순한 악역이 아닌 상처 받은 인물들로 그려지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줄리엣의 유모, 로미오의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서사에 가담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표곡 ‘Aimer(사랑하다)’와 ‘Les Rois du monde(세상의 왕들)’가 흐를 때, 관객은 샹송 특유의 서정성 속에서 묘한 치유를 경험한다. 만약 프랑스인이 이 이야기를 처음 썼다면, 애초에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로 적대하는 가문의 두 젊은 연인, 베로나를 배경으로 한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 그러나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맥베쓰, 리어왕, 오델로)에 속하지 않는다. 이 무대 위에서 사랑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면, ‘금방 지나갈 사랑’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다니 우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죽음을 넘어서는 절절한 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 마음속에 품어본 감정이다. 즉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순수함은 오직 생의 눈부신 찰나에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이 뮤지컬은 ‘증오가 사랑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어떤 증오 속에서도 사랑은 기어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프랑스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렇게 비극을 아름다운 치유의 서사로 치환하며 막을 내린다. 서로 적대하는 두 집안 사이에서 피어난 첫사랑을 경험한 남녀는 죽음을 초월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용감해지며, 끝내 사랑이 존재했다는 강력한 증거를 남겼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했다면, 그리고 그 사랑으로 누군가의 평화를 완성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온전한 삶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사랑이 삶을 집어삼킨 열정적인 이야기. 한 번쯤은 영화가 아닌 무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눈물 흘려보길 바란다.
*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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