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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차 직장인이 되어 보게 된 '세일즈맨의 죽음'

자본주의 사회 속 인간이 자존심을 지키는 법

by 채수빈


둘리 대신 고길동에게 마음이 쓰인다면 어른이 된 거라고 했다. 대학 시절, 가장 위대한 영미희곡 중 하나라고 꼽히던 세일즈맨의 죽음을 처음 읽을 때 나는 윌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느새 3년 차 직장인이 된 나.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하늘 아래 빌딩의 불빛이 해보다 더 빛나기 시작하던 금요일 밤, 나는 연극 < 세일즈맨의 죽음 >을 보러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윌리 로먼의 처연한 생을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눈물을 꾹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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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노쇠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힘겹게 귀가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집에 왔는데도 왠지 외롭게 출장을 온 것 같은 주인공의 모습은 곧바로 관객에게 극의 몰입감을 안긴다. 윌리는 오랜 세월 헌신적으로 일했지만, 이제는 시대의 변화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아내 린다는 그런 그를 지지하며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을 보살핀다. 윌리의 아들 비프와 해피는 건장한 남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윌리와 아들들, 특히 비프와 윌리의 갈등을 중심으로 관객은 로먼 가의 ‘어쩌다 꼬여버린’ 비극을 알아간다.


윌리는 세일즈의 비결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매력’에 달려 있다고 믿으며 이를 그대로 아들들에게 주입해 왔다. 윌리가 환각으로 보는 형 ‘벤’은 윌리에게 더 큰 성공을 해보지 않겠냐고, 모험을 떠나보라고 한다. 윌리는 환각 속에서 벤이 자신에게 속삭이듯, 자신의 아들 비프에게 힘과 야심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두 아들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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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매력은 더 이상 윌리에게 없다.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다. 첫째 비프는 전도유망했던 미식축구 선수였다. 그러나 비프는 수학 낙제라는 사소한 실패에조차 면역이 되어 있지 않은 순진한 아이였다. 그는 갑자기 마주하게 된 현실에 크게 타격을 입고 계속해서 과거의 영광과 멀어진다.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감과 부담에 억눌려 도벽 증세로 나타나는 정신 질환마저 키우고 있다. 거기다 아버지의 외도라는 타락을 목격하며 트라우마도 생겨버렸다. 둘째 해피는 아버지처럼 세일즈의 길에 들어섰으나, 유흥에 둘러싸여 살며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한다.


이렇듯 로먼 가의 비극은 마주하기 어려운 현실을 자꾸 회피해 버리며 생겨난다. 서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해 대화는 늘 겉돈다. 이 소통의 부재에 관객은 약간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한 번쯤 우리가 가족에게 해봤던 말이기도 했고, 많이 들어보기도 했던 말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분에 못 이겨 소리치고 괴로워하다가도 앞으로는 자랑스러운 순간이 올 거라며 순간적으로 한가족이 똘똘 뭉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제일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간다.


부자간의 갈등이 극에 치닫다가, 비프가 윌리에게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낸다. 윌리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아요" 한 마디에 너무나도 안도하며, 아이같이 좋아한다. 그리고 윌리는 사망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자살한다. 반 세기가 지났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은 비극이다.



가정에게 침투한 자본주의


< 세일즈맨의 죽음 >은 텍스트가 많은 극이다. 이 많은 텍스트 속 ‘진정한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할 말만 한다는 뜻의 '집단적 독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분명 모든 대사가 너무 절절한데 어쩐지 모두가 독백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통의 부재로 로먼 가족은 서서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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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가 제일 하고 싶은 말, 외롭다는 말이 나오면 모두가 끊는다. 그 말을 듣기 싫어서일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일까. 이 극이 진정 비극적인 이유는, 가장 윌리에게 헌신적인 린다가 자기도 모르게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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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 늘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이해해 보라고 한다. 린다는 분명 원망하기엔 미안한 캐릭터이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외로움 앞에서는 침묵으로 응한 린다의 수동적인 소통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녀는 항상 남편을 치켜세우지만 윌리가 모험을 떠나고 싶다고 하자 더 들어보지도 않고 현재의 안정을 유지하자며, 다소 냉정한 태도로 애원한다. 린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빨리 돈을 벌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 누구의 말보다 린다의 말이 이상하게 아플 때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 적응하지 못한 윌리가 자신의 아들뻘로부터 직장에서 해고되는 모습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건, 돈이 필요하다는 린다의 말을 듣고 윌리가 잠시 말을 잃을 때다.


이 비극적인 소통의 부재를 부른 것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이미 가정에게도 침투해 버렸다. 극을 보면 윌리의 집이 회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업가 윌리 로먼. 린다는 그의 비서. 부사수 비프와 해피. 내 몸을 쉴 집에 돌아와서도 윌리는 ‘몇 달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하고, 그의 아내 린다 역시 계속 이를 말해야 한다. 집의 빚을 갚고 세월 속 낡아가는 집의 모양을 보기 좋게 수리하기 위해. 가족은 점점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기능만이 살아남고 있다. 자본주의가 그토록 쉽게 한 인간의 자존심까지도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짓밟을 수 있는 이유는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돈 얘기를 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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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즈맨의 죽음 >은 현대 비극의 고전으로 불린다. 전통적인 비극은 영웅과 왕들의 운명적인 비극을 다루었으나, < 세일즈맨의 죽음 >은 ‘보통 사람의 비극’이다. 이는 분명 극복될 수 있는 비극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의 저항이 무력하여 ‘희망고문’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비극적으로 보인다.


극은 아메리칸드림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 건강한 모델로 찰리와 버나드를 보여준다. 찰리는 자신의 교육 철학은 ‘무관심’이라고 농담하며 버나드를 멀리서 응원한다. 어린 시절 ‘범생이같이’ 공부만 하던 버나드는 성실함으로 법률가가 된다. 다만 '오징어 게임'이 등장한 시대에서 본 < 세일즈맨의 죽음 >이 제시하는 이 희망은 이제 가냘프게 느껴진다. 더 이상 성실함만이 성공을 가져다주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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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는 첫째 비프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늘 주목받지 못했던 둘째 해피와 윌리가 정말 닮아 있다. 윌리도 둘째였으며 제대로 된 관심을 받으며 크지 못했다. 세일즈의 길을 걷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궁금하다. 해피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해피는 비프와 반대로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성실하게 일했을지는 모르겠다.


해피의 죽음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통의 부재로 비극이 일어났으니, 소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서 개인은 어떻게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이 안 될 때 우리는 “들리게 말해”라고 하지만 "들으려는 자세"도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네 가치를 제공해야지”라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가치를 알아보려는 자세도 있어야 한다.


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무 많다. 윌리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모습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만 나를 가장 긴장하게 만들었던 장면은 다른 장면이다. 바로, 비프와 해피가 아버지를 두고 계산하지 않은 채 술집에서 나갈 때 나는 가장 긴장했다. 종업원이 윌리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을 청구할까 봐. 그렇지만 종업원이 윌리의 주머니 속에 돈을 도로 넣어줘서 너무나 고마웠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몇 푼 돈에 받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들으려는 자세" 중 하나가 아닐까?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난 싸구려 인생이 아니야, 난 윌리 로먼이고, 넌 비프 로먼이라고!"

마지막에 비프가 윌리를 향해 원망하자 윌리가 하는 말이다.


어렸을 때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읽을 때,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썩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주인공들이었다. 윌리 로먼도 그렇다. 그는 외도를 저질렀고, 아들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했고, 시대를 잘못 읽고 있었다.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려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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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뜯어보자면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내가 이 날 본 윌리는 영웅적이었다. 분명히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신념에 맞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윌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무게, 시대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가족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결코 안쓰럽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자꾸 미안해졌을 뿐이다. 그의 외로움을 들어주지 못해서. 그리고, 윌리에겐 그의 곁을 지켜준 좋은 친구 찰리가 있지 않았나. 영화 <멋진 인생>에서 말했듯, "친구가 있는 한 그의 삶은 실패가 아니다". 윌리 로먼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충분히 ‘좋은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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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즈맨의 죽음 >은 가장 위대한 희곡 중 하나로 불린다. 1949년 초연된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사랑받으며, 여전히 우리를 울리는 작품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않는 점은, 바로 모든 시간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전들의 공통점은, 사람의 본질을 건드린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사람의 본질을 '자존심'이라 말한다. 우리가 윌리를 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영어로 ‘pride’. 그 아무리 헛된 자부심의 모습을 띌지언정, 분명 자존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다. 각자 극을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세일즈맨의 죽음은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인간'보다는 오히려 ‘가장의 떳떳하게 살아있는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다.



아버지도 소년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아버지가 된다


예전에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다. 그냥 나한테는 나의 엄마로, 나의 할머니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식은 부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양육법에 대한 책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봐야 할지 써놓은 책은 많지 않다. 어느 순간 부모도 그저 인간이었음을 인지하게 되면 마음이 무척 이상하다. 그때가 자녀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다. 바로 ‘정서적 독립’의 순간이다.


비프의 미식축구 경기를 보면서 “비프가 헤라클레스처럼 보였다”라고 하던 윌리 로먼에게 나의 가족이 겹쳐 보여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나는 초등학교 때 키가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의 키는 158cm로, 키 때문에 맨 뒤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뒤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할머니의 호들갑이 기억났다.




비프를 회상하던 윌리가 “달이 지나가고 있어,”라고 린다에게 속삭일 때 1막이 끝난다. 윌리가 쫓던 것은 정녕 ‘아메리칸드림’이었을까? 아니, 극을 끝까지 보고 나니 그런 생각보다는, 윌리는 그저 자식에게 인정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에게 비프는 저 위에 있는 헤라클레스였고, 달이었기 때문이다.


극 마지막, 텅 빈 세일즈 가방처럼 보이던 윌리의 관. 한 송이의 장미. 그리고 흘러나오는 비가. 늘 모험을 떠나고 싶었던 윌리가 마지막에 아이처럼 텃밭을 지나 살금살금, 쉬이 하며 지나가던 마지막 모습이 순간 스쳐 지나가 울음이 터졌다. 이어서, 집에 왔는데도 어딘가로 외롭게 출장을 다니고 있을 것 같았던 첫 장면도 떠올랐다.


박근형 배우의 연기로, 윌리 로먼을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희곡은 정녕 무대를 위한 텍스트였다. 박근형 배우의 명품 연기와 고전의 텍스트가 만나자, 대학생 때와 달리 나는 윌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들, 할아버지들이 다 윌리 로먼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만이 가진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문제 많은 사람을 보며 나에게 자문하고, 나에게 솔직해짐으로써 남의 문제도 용서할 수 있게 한다. 예술은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어느덧 내 편으로 만들어준다. < 세일즈맨의 죽음 >은 고전의 힘,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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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즈맨의 죽음 >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작품


< 아메리칸 뷰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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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중산층의 비극을 다루는 작품 < 아메리칸 뷰티 >의 또 다른 무너진 가장 '레스터'를 보면 윌리 로먼에게 있는 고결함을 알 수 있다. < 아메리칸 뷰티 >에서 자신이 힘들다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레스터와 달리, 윌리는 매일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과거의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린다. 윌리가 마주하기 어려운 현실을 회피할 때마다 그가 갖고 있는 죄책감은 환각으로 변해 그를 미치도록 따라다닌다. 특히 새 스타킹을 갈취하듯 윌리에게 받아내며 신나게 웃던 여인의 기괴한 웃음소리는 윌리의 꼬여버린 인생을 조롱하는 듯하다. 그의 죄책감은 마지막에 사망보험금을 남기도록 종용하는 역할이었다. 반면 레스터는 마지막에 가서야 가족과 함께했던 사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귀했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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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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