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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왜 세 번이나 재탄생되었나

우리는 모두 집을 찾아 헤매는 존재

by 채수빈

한 번이라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한 경험이 있는가?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 말이다.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세상과 합일된 기분. 조각났던 내 마음이 춤추고 있는 기분. 아직도 기억한다. 바르셀로나 2층 버스에서 바라본 핑크빛 하늘을. 벅차올라 저절로 나왔던 눈물을. 그때 들렸던 음악, 바람, 공기. 처음으로 내 존재를 완전히 인정받은 경험이었다. 그때 세상과 나는 완전히 하나였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게 다 있었다.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오히려 드디어 집에 왔다고 느꼈다.



81NWiZZjL0L.jpg 원작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표지


이 ‘집’이란 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내 방, 주소, 또는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할까? 나는 집이란 ‘그냥 나’로 있어도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전업주부들에게 집이란 일터, 책임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엄마에게 집의 역할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지?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프란체스카가 죽은 후 자녀들이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되짚는 회고의 구조다. 우리의 부모의 삶에는 우리가 미처 다 알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01.37710226.1.jpg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틸컷


프란체스카 존슨은 전쟁 후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 여성이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이 당연시된 채 중년을 맞은 그녀는 어느 여름, 가족이 여행을 떠나 오랜만에 혼자가 된다. 그리고 우연히 나타난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를 만나게 된다. 프란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길을 안내하며 두 사람은 단 4일 만에 서로의 인생에 깊이 스며든다. 로버트는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프란은 결국 가족에게 돌아간다.


이 이야기를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순 없다. 일단, 빼도 박도 못할 불륜이다. 우리는 소위 '환승'도 곱게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에 눈물지을까? 영화와 뮤지컬로 재탄생할 만큼 말이다.


Bridges-of-Madison-County-1600x900-c-default.jpg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틸컷


어쩐지 이 이야기를 마냥 심판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프란체스카가 '불륜을 한 사람'이기 전에 '욕망이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 안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여자'로서의 자아, 욕망하는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의 첫 만남에서 소녀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지며 여인이 된다. 소녀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상처와 꿈이 비로소 이해받는다. 욕망을 상실했던 개인이 다시 소녀로 돌아가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한 명의 여인으로 성숙한다. 그래서 분명 불륜임에도 어쩐지 우리는 뭉클함을 느낀다. 우리 자신도 어떠한 결핍을 품고 있음을 은연중에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말 그대로 로버트가 정말 프란체스카가 꾼 한낮의 꿈이었다면 어땠을까? 프란체스카를 심판하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적인 욕망과 감정적인 소통이 드러내는 것은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자신의 영혼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로버트는 그녀의 집에 찾아와 프란체스카 본인도 존재하는지 몰랐던 문을 연다. 그녀는 그제야 자기 존재가 보이는 감각을 회복한다. 나라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집을 얻는다.


20250520-394c5bc5.jpg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틸컷


로버트가 주는 것은 완전한 이해와 존중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단 한 번의 순간, 로버트를 통해 존재로서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자기 수용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가족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선택마저 존중한다. 그 사람이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응원한다. 따라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이야기의 본질은 내면아이의 치유이다.


프란체스카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로버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밖에서 바라만 보는 것에 익숙했던 방랑자였다. 사진을 찍는 행위처럼 말이다. 프레임 안에 본인이 들어가 있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나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와 있으며 사실은 얼마나 자신이 집을 바라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image001.png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틸컷


나는 그들이 했던 게 불륜의 상황에 처해져 있지만, 분명 특별한 교감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이 성숙한 사랑을 했다고 보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함께 떠났다면 사랑이 아닌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서는 사랑을 세 가지 요소로 나눈다. 친밀감, 열정, 헌신이다. 그리고 이 요소의 결합 방식에 따라 여덟 가지 형태의 사랑이 있다. 친밀감만 있으면 우정, 열정만 있으면 짝사랑(일방적 사랑), 헌신만 있으면 공허한 사랑이다.


스턴버그는 친밀감과 열정만 있고 헌신이 없으면 낭만적 사랑, 친밀감과 헌신이 있고 열정이 없으면 우애적 사랑, 열정과 헌신이 있지만 친밀감이 없으면 허구적 사랑이라고 말했다. 세 요소 모두가 있으면 성숙하고 완전한 사랑이라 볼 수 있다. 반대로 세 요소가 모두 부재하면 '비사랑'이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순간의 '낭만적 사랑'을 했다. 헌신은 그만큼 어려운 요소다. 욕망의 유통기한과 결혼의 유통기한은 그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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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결혼생활은 자세히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애초에 결혼한 건 프란체스카의 선택이지 않았는가? 그녀는 누구에게 강제로 떠밀려 결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종종 냉소적이다. 처음에 그녀의 자유의지가 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결혼은 ‘선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수한 표기와 유지의 결정을 개인에게 종용한다. 더군다나 옛날에는 결혼이란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을 단 사업이었다.


결혼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다. 우린 보통 결혼이 연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혼식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시작"을 축복한다. 가볍게 말하는 "애 때문에 사는 거지"라는 말은 그 개인이 뒤로 하는 것에 비해 말의 무게가 너무나 가볍다. 아내와 남편이 되면 희생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욕망과 자아를 완전히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서로의 새로운 집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가 서로 여자고 남자라는 사실을 잊을 때, 욕망이 있는 개인이라는 걸 잊을 때 부부의 비극이 일어난다.


20250507503023.jpg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스틸컷


부부는 서로를 양육하는 두 번째 부모가 된다는 말을 읽었다. 나는 그게 서로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집이 되어주라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줄거리는 당연히 부도덕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단죄하는 게 아니라, 내 세계를 일깨운 사건을 마주치면 그걸 되돌릴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불륜은 이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극적 장치에 가깝다. 내 집에 들인 낯선 사람이 문을 열어 버린다. 또 다른 세계로의 통로. 또 다른 집을 찾을 통로. 나를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집, 온전한 자기 수용의 경험을 인간은 늘 욕망한다. 인생은 '집'의 감각과 닮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평생의 과정이다.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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