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만나는 영혼의 여행

언어별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이야기

by 채수빈

내 친구가 말하길, 나는 영어를 쓸 때의 목소리와 한국어를 쓸 때의 목소리가 다르단다. 순순히 인정하는 바이다. 내가 영어를 쓸 때와 한국어를 쓸 때의 텐션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일단 영어를 쓸 때는 많은 것을 긍정하게 된다. "아니요, 싫습니다, 그 이유는…"이라고 하며 부연 설명을 하기엔 언어 수준이 모국어만큼 유창하지 않다. 또한 나는 시트콤과 미드로 영어를 배웠기에 약간 만화스러운 몸짓과 어투도 함께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는 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상황 속에서 쓰다 보니,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웃음이 많아진다. 반면 한국어를 쓸 때는 다소 냉소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편이다. 모국어 안에서만 가능한 비꼬기를 마음껏 한다. 한국인들은 외국에 비해 제법 비슷한 배경과 외모를 지녔다. 아니, 애초에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가족, 친구 아니면 동료들이기에 익숙한 대화들이 오고 간다. 이렇듯 나의 언어별 인격, 언어별 페르소나는 여러 요소로 탄생했다.



'말엄마’로 다시 태어나기


무려 73개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전해지는 볼로냐의 추기경 메조판티는 언어를 바꿀 때의 느낌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초록색 안경을 끼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이 초록색으로 보이셨을 겁니다. 제 경우도 딱 그렇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러시아어를 이야기할 경우, 러시아어의 색안경을 낀 것과 마찬가지여서 제 생각도 오로지 그 언어로만 보입니다. 다른 언어로 넘어가려 한다면, 저는 그저 색안경만 바꾸면 됩니다."


이러한 언어별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페르소나를 갖게 되는 건 나처럼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언어 간의 차이, 언어를 배울 때 개인적 배경의 차이, 배운 방법의 차이 등을 들 수 있다. 다와다 요코의 글을 읽고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단어를 찾았다. 바로 ‘말엄마’다.


나는 나에게 언어를 선물해 준, 독일어로 여성 명사인 타자기를 말엄마라고 부른다. 사실 이 타자기로는 타자기 안과 그 몸 위에 지니고 있는 부호들만 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 부호들을 반복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 나는 새로운 언어에 입양될 수 있었다.
...
새 말엄마를 갖게 되면 유년 시절을 다시 한번 겪을 수 있다. 유년 시절에는 단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모든 단어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은 단어를 문장 내의 의미에서 해방시켜준다. 심지어 어떤 단어들은 너무나 생명력이 넘쳐 마치 신화 속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
p.45 (부적 - 엄마말에서 말엄마로)


외국어를 배울 땐 말엄마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태어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또한 얼마든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기도 편하다. 모국어 속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어쩐지 물어보기가 애매한 상황이 많다. 반면 외국어를 배울 땐 제로베이스가 디폴트로, 허세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 편하다.



번역 과정에서 찾아지는 새로운 의미


사람들은 어떤 외국어를 배울지 선택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모국어는 그렇지 않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미국인이고, 인생의 반을 파리에서 살았고, 나를 만든 반이 아니라 내가 만든 반이 오늘날의 내가 만든 것을 만들었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국어는 사람을 만들지만, 사람은 외국어로 뭔가를 만들 수 있다고.
p. 25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 - 이격자)


또한 모국어를 쓰는 상황에선 모국어를 함께 쓰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나 외국어로 다시 단어를 정의할 때에야 비로소 내 진짜 감정을 알게 될 때가 있다. 한 예로, 나는 한국어로는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를, 영어로 떠올린 후에야 분명하게 구분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지인이 내게 분명 무례한 말을 했기에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모두에게 밝힐 수 있는 말만 적기에, 그의 말을 온전히 옮기기가 어렵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그에게 찜찜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그렇게 반응한 건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라고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말하여 순간 정말 그런가 싶었으나, 아무리 봐도 이건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영어로 생각해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존감은 self-respect고, 자존심은 pride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존심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존심은 자부심과 관련이 깊은 단어이다. 비로소 찜찜했던 마음이 자유로워졌다. 타인과 있을 땐 자존심을 더 지켜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 또한 체득했다. 외국어를 통해 나는 자유를 얻었다.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인간의 몸 또한 번역 작업이 행해지는 여러 방을 가지고 있다. 내 추측으로 여기에서는 원본 없는 번역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물론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 고유한 원본 텍스트가 주어진다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원본 텍스트가 보존되는 장소를 영혼이라고 부른다.
p.45 (부적 - 영혼 없는 작가)


이 책의 제목은 <영혼 없는 작가>이다. 그는 영혼은 스스로 홀로 유영할 수 있는 존재기에 자신의 영혼이 자신 곁에 ‘없다’고 표현한다. 작가는 영혼에게 자율성을 줌으로써 영혼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존중한 것이다. 영혼에 있어 본질을 찾을 것을 요구하기보다, 얼마든지 영혼이 여행할 시간을 주는 다와다 요코의 세계는 무척 안전하게 느껴졌다.

영혼없는작가+앞표지+띠지.jpg

<영혼 없는 작가>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다와다 요코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와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쓰고 있다. 내가 느낀 감정을 편하게 떠올리기보다는, 지난날 스스로가 해보았던 통찰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내린 인생의 결론들을 논리적으로 함께 곱씹게 된다. 그렇지만 언어유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느릿하게 진행되는 생각의 산책은 꽤나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영혼 없는 작가>는 단편 문학, 산문,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어 그녀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다. 현재 작가는 올해 말 출간 예정인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보다 긴 호흡을 자랑하는 소설에서는 그녀가 어떤 신선함을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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