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의 감동은 모두를 끌어안아주는 것에 있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늘 서양 특유의 시각적 화려함에 끌렸다. 영문학의 기반이 되는 기독교적 신화도, 그리스 로마 신화도 인격적 신이 등장하기에 눈에 그려지는 것들이 선명했다. 반면 한국문학은 낯설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문학들은, 내가 한국인인데도 단어의 뜻을 모르겠는 것이 많았다. 한국문학은 내게 명절에 만나면 분명 반갑지만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친척 같았다. 그런 내가 드물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었던 이야기가 바로 <최척전>이다. <최척전>의 '최척'보다도 그의 아내 '옥영'의 이름을 기억한다.
연극 <퉁소 소리>는 <최척전>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펼쳐 보인다. 옥영을 비롯해 무대 위에서 만난 인물들은 다시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옥영이 나의 어머니와 닮아 있었기에 목이 메는 기분으로 보고 있었는데, 마침 함께 공연을 함께 본 어머니는 또 당신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한국어로 '정'과 '한'이 있다. <퉁소 소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속에서 헤어지고 재회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이 정과 한을 무대 위에서 선보인다. 열심히 일구어놓았던 개인의 삶을 전쟁이라는 사건이 한순간에 파헤쳐놓지만, 그 속에서도 다시 이어지려는 마음, 다시 만나려는 의지가 전쟁보다 강하다. 삶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때 그리고 가족이 그리울 때 나지막이 부는 퉁소가 이 의지의 상징이다. 연극 <퉁소 소리>가 극의 이름을 '최척전'으로 하지 않고 '퉁소 소리'라 한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퉁소'를 지닌 인물은 최척이긴 하지만, 퉁소 소리에 모든 인물들이 반응한다.
또한 최척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 아내 옥영을 비롯해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최척의 삶을 채운다. 1막에서는 아내 옥영의 이야기가 특히 빛을 발한다. 옥영은 시대를 앞선 강인한 주인공이다. 최척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고백하는 것인 물론이요, 결혼하기 위해 자살 소동을 벌이기까지 한다. 남장을 하고 외국 타지에서 생활하며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옥영과 재회한 후 2막에서 다시 한번 전쟁이 터지며 또 한 번 최척과 옥영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최척은 어릴 적 헤어졌던 자신의 첫째 아들을 전쟁에서 만난다. 둘째 아들의 며느리, 홍도의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만나 사돈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옥영은 남편을 다시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널 배를 만들고 있었다. 옥영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며 한순간도 뜻을 잃지 않는다.
그렇게 극의 끝에서는 헤어졌던 모든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다. 관객은 왠지 흐느끼고 싶은 즐거움을 느끼며 커튼콜이 끝나고 보이는 '안녕히 사세요' 문구에 다시 한번 가슴이 찡해진다. 안녕하다는 것은 참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퉁소 소리>는 고선웅 연출 특유의 실험적이면서도 명료한 방식으로 빛난다. 화려한 장치에 기대지 않고, 내레이션을 적극 활용해 관객과 무대 사이의 벽을 허문다. 관객은 자연스레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정이입을 경험한다. 여기에 국악 오케스트라의 6인조 라이브 연주가 더해져, 극적인 사건과 인물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특히 바람처럼 스며드는 퉁소 소리는 작품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2025년 백상예술대상 백상 연극상, 2024 평론가가 뽑은 한국 연극 베스트 3로 선정된 <퉁소 소리>는 재연으로 돌아왔다. 연극 <퉁소 소리>는 단순히 고전의 재현을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전쟁과 이별, 끊임없는 상실을 겪지만 사랑하는 이와 다시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조선 시대의 이야기임에도 국경을 초월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간이 지닌 보편적 감정은 그만큼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문학 속 화려한 수사와 이미지를 보며 늘 거리를 두고 감탄하던 나는, <퉁소 소리>에서 이야기가 직접 나를 붙잡고 끌어안는 순간을 경험했다. 무대 위 기발한 재치와 강인한 정신이 내 곁으로 먼저 다가와 뜨거운 포옹을 건넸다. 함께 전쟁 속에서 버티고 살아남는 동지가 되었다. 날카로운 농담과 유머, 그리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선조들의 강인한 정신이 무대에서 튀어나와 내 어깨를 두드리고,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빈말이 아니라 온 진심을 다해서 말이다.
풀잎처럼 다시 일어서는 민초들의 강인함을 통해 든든한 안부를 전하는 <퉁소 소리>는 9월 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가을의 시작을 퉁소 소리가 보내는 희망찬 위로로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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