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을 물리치는 당신을 향한 시라노의 응원
뮤지컬 시라노를 다 보고 나면, 고백을 받은 기분이다. 한 영웅이 전투를 끝내자마자 내게 달려와 장미 한 송이를 바치며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맹세하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고귀한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뮤지컬 <시라노>의 배경은 17세기의 프랑스 파리다. 시를 쓰는 재치, 무적의 검술, 젠틀한 매너까지 모두 갖춘 '시라노'. 그는 말 그대로 1대 백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남자다.
그의 유일한 콤플렉스는, 얼굴 한 가운데 커다랗게 자리한 '코'. 외모에만큼은 자신감이 없는 시라노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록산'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 사이 록산은 우연히 자신을 구해준 잘생긴 청년 '크리스티앙'에게 반해, 자신과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도와달라며 시라노를 찾아온다. 말을 잘하지 못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크리스티앙을 보고, 시라노는 그를 대신해 사랑 고백을 담은 편지를 쓴다.
매일 그를 대신해 마음을 전할 수록 자신의 마음은 커져만 가고,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속해 있는 가스콘 용병대가 전쟁에 나가게 되면서 삼각관계가 더욱 꼬이기 시작한다.
뮤지컬 시라노는 사랑과 낭만을 상징하는 '달'과, 영원히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은 적들을 상징하는 '거인'이라는 테마가 번갈아 나오며 진정한 사랑, 진정한 영웅에 대해 노래한다. 뮤지컬 제목이 '시라노'이듯, 이 진정한 사랑과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연 주인공 시라노이다.
우리가 시라노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지이다. 시라노는 '대의'를 말하는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대의'라는 것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그에게 대의란 위선과 비겁으로 지금 자기 옆의 사람들을 돌보지 못하는 윗 사람들, '거인'들의 변명일 뿐이다.
영웅은 고립된 전장에서 끝까지 싸운 병사들
또 그들을 믿고 이곳에 남아 묵묵히 버텨준 시민들입니다
도망간 당신들이 아니라!
그에게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당장 자신을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가 영웅의 척도이다. 그는 빵 봉지에 적힌 시를 위해, 그 시를 쓰는 시인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의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 시라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맹세를 지킨다. 그에게 록산은 지치고 힘들 때마다 늘 올려다보게 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1막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드 기슈 백작은 그런 시라노를 돈키호테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많은 경우 목적이 없는 순수한 행위들은 미친 짓으로, 심지어는 도태되는 행위로도 여겨진다. 그래서 시라노는 당당히 그가 말했던 약속을 지킴으로써, 달로 대변되는 순수함의 아름다움을 증명해낸다.
그는 고뇌하기만 하는 햄릿도 아니고, 즉흥적으로 행동을 일삼는 돈키호테도 아니다. 그저, 록산이 "시라노는 올 거야, 그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거든."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되는 것이 그의 낭만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약속을 지킨다. 남자답고 영웅다운 시라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넘버가 <거인을 데려와>다.
한겨울에 비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쳐도
위대한 거인들과 맞서리라
거짓으로 위선으로 무뎌진 심장을 깨워
비겁한 족쇄를 벗고 거인과 맞서리라
고결한 달빛이 되어 죽은 밤을 밝히리라
나라는 친구 미지의 운명이여
또한, 시라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 록산에게 화를 내거나, 크리스티앙을 질투하거나 시기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코를 놀리는 사람들에게도 잠깐 새침하게 응할 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안에 쌓인 감정을 표출하는 넘버, '나 홀로'에서도 그가 분노하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의 운명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선뜻 외로운 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시라노가 주는 또 다른 감동이다.
시라노처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크리스티앙이다.
그는 말은 못해도 마음이 순수하다. 시라노가 외사랑의 절절함을 보여준다면, 크리스티앙은 누구나 겪는 첫사랑의 어설픔을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수룩해보이는 그에게도 '달'이 있다. 그는 입양된 후 바로 친자식이 생긴 집안에서 자라, 눈치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그는 '멋있게 살아보자'는 단순하지만 진실한 각오를 실현하기 위해 입대를 결심한다.
그리고 시라노는 이런 크리스티앙을 지키기 위해, 그를 '달'로 보내주기 위해, 끝까지 본인의 행적을 록산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와 지켜내고 싶었던 약속인,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며 전투에서 그의 몫까지 싸운다.
시라노의 감성적 대사들, 특히 요즘 듣기 힘든 문학 스타일의 사랑 고백들은 관객을 설레게 하기 충분하다.
세월을 따라 흘러간 풍경들이
아련히 손짓해 내 영혼의 친구여
나의 천사 나의 꿈
내 영혼의 숨결 같은 그대여
낯설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고백'을 들으며 관객은 감동을 느낀다. 사귀자고 말하는 것도, 심지어 사귀고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요즘이다. 관객은 내가 저렇게 순수한 고백을 해본 적이 언제였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시라노의 아름다운 고백을 들으며 관객은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고, 내가 과연 살면서 한 번이나 고백다운 고백을 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만, 록산이 그토록 바랬던 '영혼의 고백'은 안타깝게도 영혼'만'의 고백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를 담을 껍데기가 필요하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키스를 나누는 것을 보며 자괴감을 느낀다.
그 키스 내 입술로 맺어진 열매를
왜 나는 누릴 수 없나
패배뿐인 승리인가
내게 허락된 것은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사랑이란 짐승은 나를 조롱하고 비웃나
잔인한 영광이로다
내 말을 품은 입술에
나의 그녀가 입 맞출 때
시라노가 유일하게 물리치지 못했던 거인이 이 껍데기이다. 용맹한 시라노도 사랑 앞에서는 본인의 결점만이 보인다. 사실 이 극을 보는 우리에게는 시라노가 너무나 멋지게 느껴져 어느덧 그의 코는 보이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나의 콤플렉스는 그 어떤 거인보다도 거대하게 느껴지며 나의 다른 장점과 자원들을 가려버리고 만다. 우리의 껍데기로 인한 결핍과 콤플렉스 앞에서 우리는 영혼이 고백하고자 하는 것과 쉽게 타협한다. 그런 면에서는 크리스티앙이 시라노보다 훨씬 영웅적이었다.
그는 록산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순순히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려 하는 사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모두의 고백은 반쪽짜리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이 공교로운 관계를 관객이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에도 불구하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전장에 나가는 것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행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당신의 '달'은 무엇인가?
너무 아름답고 고결해서, 나의 손길 한 번에 무너질 것 같이 소중한 것. 그게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오랫동안 꿔 왔던 꿈일 수도 있다.
바라만 보아도 행복한 것, 그렇지만 그만큼 나를 아프게 하는 것.
'나 홀로'라도 그 달을 향해 용기 내어 걸어가라고, 시라노는 우리를 응원한다.
#뮤지컬시라노
#우리는가스콘_어디든_함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