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나와야만 보이는 것들

수치심을 명명하는 대신 마음껏 파고드는 치유의 여정

by 채수빈

“저는 우울감이라는 게 뭔지 몰라요.” 예전에 한 동료분이 이렇게 말했을 때, 정말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반대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신기했겠지만.


나는 분명 그가 악의 없이 한 말임을 안다. 그러나 분명 그의 표정에는 묘한 당당함이 있다고 느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우월감이라기보다는, 우울이라는 ’병‘에 걸린 적이 없는 자신의 건강이 표준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느끼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어서 나는 확신했다. 언젠가 본인이 그 말을 했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고. 왜냐면 우울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우울감을 한 번도 안 느껴봤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이다. 감정에 엄청나게 무디거나, 우울함을 느낄 만한 환경에 별로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의 말은 내게 '부끄러울 게 뭐가 있지?'로 읽혔다. 그러니 우울할 필요도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쯤에서 그는 남자라는 말을 덧붙여본다.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부끄러움을 쉽게 느끼게 만들 트리거들이 이곳저곳에 도사리고 있다. 수치심은 우울함을 키운다. 그리고 ’우울한 여자‘를 ’미친 여자‘로 보는 프레임도 참 많다. <의미들>의 저자 수잔 스캔런은 도리어 이 프레임을 파고들어 자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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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은 그녀가 스무 살에 자살 시도를 한 뒤 정신 병동에서 보낸 삼 년의 장기 입원 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록이다. 자신의 지난 의료 기록들을 보며 솔직하게 써 내려간 책이다. 그러나 읽기 쉽지 않았다. 일단 '자살'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 자신을 찌르고 있는데 나는 이를 조용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인용한 작가들의 문장들, 그리고 <연인>, <벨 자> 등 그녀의 ‘인생 책‘이 소개될 때 잠시 숨통이 트인다. 그녀가 가장 위로를 많이 얻은 것은 그저 ’묘사‘된 것들이다. 어느 판단도 받지 않고 그저 수용된다고 느꼈기 때문 아닐까. 나 역시 그 어떤 상담이나 대화보다 예술에서 많은 위로를 얻은 사람으로서 공감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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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진정으로 구원해 준 것은 항우울제가 아닌 독서와 글쓰기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독서가 자신을 살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이 너무 낯설고 고유해서, 다른 누군가도 이렇게 느꼈으리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공포가 그녀를 쓰게 했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 안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힘쓰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에 기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속수무책의 무력함, 누군가가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안다고 믿을 때 오는 편안함'을 갈구한다.


그러니까 창밖을 내다볼 때면 우리는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항상 끔찍한 일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게 문제였다. 거기가 안락했다는 것이. 이는 항상 내 크나큰 딜레마 중 하나였다.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어떻게 내 내면의 삶을 보호할 것인가가. 나는 창조하기에도 혹은 외적 삶의 요구들에 적응하기에도 너무 미흡했다. 그 시절, 그 병원에서 보낸 내 실존은 온전히 내면의 삶을 경작하는 일에 있었다. 이는 내 경험에 대한 회복적 독해다. 나는 문학평론가 이브코소프스키 세지윅이 말한, 독서는 편집증적이거나 회복적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다. 회복적 독서는 심하게 결점이 있는 작품에서조차 긍정적인 것을 찾고자 한다.

정신병원에서 살아가는 것,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원한 것, 반복해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 그 증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이 구원받기 원했다. 우리는 죽기를 원했거나, 아니면 삶과 죽음 사이의 무언가를 원했다. 병동 생활은 우리가 원한 것에 가장 가까운 상태였다.

<의미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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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가치는 중후반부에 있다. 읽으며 그녀가 분명 달라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연한 연필을 통해 겹겹이 진해지는 소묘처럼,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다.


"닥터 톰린슨: 병을 앓는 것은 당신이 느끼는 나쁜 감정에 대한 치유책이다."

그 문장은 그 시절에 내가 접한 문장 가운데 가장 예리하고 핵심을 찌르는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을 적어두었고, 거기 담긴 진실을 알아보았다. 그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 아마.

나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닥터 톰린슨의 말이 맞았다. 그게 내가 그 문장을 적어둔 이유다. 그 의사가 내 연기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D.W.위니컷은 숨고 싶은 욕망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아이가 은밀한 자아 - 스스로 표현하여 남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마치 마법처럼 이해받기를 바라는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을 규명했다. 애덤 필립스는 이를 숨는 것은 즐겁지만 발견되지 않는 것은 재앙이 되는 복잡한 숨바꼭질이라고 불렀다.

<의미들>, p.34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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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읽으면서 기뻤던 장, 353쪽. 정말 솔직하고 중요한 챕터라고 느꼈다.


나는 이 순간을, 내가 살겠다고 선택했던 이 순간을 수년 뒤에야 의식했다.

그것은 자기 혼자 속으로만 하는 그런 종류의 결심, 지킬 수 있을지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새해 결심 같은 것이었다.

나는 몇 년이 지나,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고 난 후에야 그것이 선택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의미들>, p.353



무언가가 고정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완벽주의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병도 결국 자가 진단의 일종이다. 병원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내가 느낀 증상들이 무엇이었는지다. (나는 가끔 내가 어느 정도로 말해야 하는지 헷갈리곤 한다)


이 모든 근원이 '애착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저자는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 또한 애착 문제가 아주 크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근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최대한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세계에서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로 보이는 의사들, 병원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그래서 저자가 책에서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수용된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심리 상담을 받았을 때 상담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한 것들도 있었지만, 정작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었던 건 여행을 간 나라에서 하루 종일 정처 없이 걸으면서였다.


나는 진단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지금은 너무나 모호하고 부정확하다고 보는 것을 한때는 그대로 믿었다. 많은 경우에, 많은 사람에게 진단이 실질적인 고통의 경험을 포착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이미 주어진 상태 안에서도 위안을 찾을 방법이 우리에게는 많이 있다. 이는 어느 수준에서는 늘 불가해한 부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다. 이것이 내게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이유다. 내가 이 의사도 그들을 알기를 바라는 이유다.

<의미들>, p.501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선 성격장애와 같은 진단명들은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이나 ICD(국제질병분류)에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복잡한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분류 체계일지도 모른다. 진단은 사람을 라벨로 묶고, 그 라벨은 다시 치료의 유연성을 제한한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의 이름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또한 생물학적 근거도 불충분하다. 정신건강 문제는 단일 원인이 아닌 복잡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특정 유전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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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심리치료 접근법은 개인의 문제를 진단명이 아닌 ‘네트워크’로 바라본다. 이 네트워크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노드(node)’로 구성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 생각: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야’

- 감정: 외로움, 슬픔, 불안

- 행동: 반추(같은 생각을 계속 되풀이함), 회피

- 경험: 과거의 학대나 트라우마


이 노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 강도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혼자서 술을 계속 마시는 사람'을 '알콜 중독'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네트워크를 살펴보는 것이다. 외로움(감정),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생각), 사회적 고립(행동)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나는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어’라는 생각과 강하게 연결되어 혼자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네트워크를 이해해 어떤 노드에 집중하는 것이 전체 시스템을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인 심리치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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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기 고통과 상심이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다가 책을 읽는다.
- 제임스 볼드윈


이 문구를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녀는 어느덧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수잔 스캔런은 자신의 지난 일기, 타인의 자기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어떻게 느꼈을까? 다른 사람 같다고 느꼈을 것 같다. 내가 내 일기를 볼 때 그렇다. 정말 무섭고도 힘든 작업이었을 텐데, 솔직하게 털어놓아준 그녀가 대단하다.


이 책의 제목은 <의미들>이다. 삶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대한 책이다. 다 읽고 나서 제목 앞에 ‘지금’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의미'란 참 말랑말랑한 것이다. 지금의 내가 어떤지에 따라 의미를 번복할 수 있다. 그녀는 여러 번 '내 병에 관한 이론을 세우려는 시도'를 하고, 거기서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되돌아볼 때라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상담 또한 내담자가 상담을 받고 싶어할 때다.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의미를 두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변하고 싶을 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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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계속해서 집어삼켜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자는 그녀가 담담하게 서는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저자는 광기에 실질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면모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지만, 마음껏 아파하는 것이 어쩌면 치유 과정일지도 모른다. 떨쳐낼 수 없는 생각을 따라가보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사실은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첫 부분만큼은 읽기 힘든 것을 넘어서, 괴로웠다. 주기적으로 자살 이야기를 하는 리오라는 사람을 보면서는 정말 이 사람이 입을 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리오는 그녀에게 함께 자살 시도를 하지 않겠냐고 권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의사는 불편해 보였다. 나는 그를 편안하게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할 때 일어나는 일,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 슬픔으로, 연민으로 바뀌는 얼굴, 그 반응이 마치 애도처럼 다시 나에게 되비치며 내 수치심을 더욱 깊게 만드는 일, 혹은 내가 그 사람에게,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하고 안심시켜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일. 이런 일이 우리의 고난을, 우리의 슬픔을 전달하는 일에 따르는 문제일 때가 많다. ... 우리는 정말이지 서로에게 어느 만큼을 물을 수 있는 걸까? 움츠러들지 않고, 어느 만큼을 품을 수 있는 걸까?

<의미들>, p. 499


나는 언젠가부터 자살이라는 단어가 버겁다. 그 단어에 마치 전염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버거움은 사람들이 우울증이 극심한 사람과 오랜 시간 대화할 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인데 말이다. 타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전적이 있는 리오라는 사람은 사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찌르다가 결국 타인까지 찌르는 사람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저자도 '어느 만큼 물을 수 있고, 어느 만큼 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내가 터널에 직접 무모하게 걸어들어가 그를 빼내줄 수는 없겠지만, 터널 앞에 기다리고 있는 등불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디쯤 왔다"라고 말해줄 수는 있다. <의미들>은 그런, 등불과 같은 책이었다. 운 나쁘게 어두운 터널로 들어섰지만, 일단 등불을 따라 걸어 나오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분명 알 것이라고 직접 증명해낸 책이다.



*참고 문헌: <앤디의 마음챙김 레터>, <심리학 영문 콘텐츠 요약 뉴스레터>(오송인)


읽기 힘들었으나, 읽은 후 함께 강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우울증을 이해하고픈 모든 분께 추천드립니다.

(다만 자살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니, 미리 이 부분만 유의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문화는소통이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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