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에 압도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피고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 연극 <트랩>

by 채수빈

요즘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양심이 수치심이 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연극 <트랩>은 한밤중 저택에서 열리는 재판 놀이로 인간의 욕망과 양심, 죄책과 수치심이 서로 뒤엉키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 광기 어린 모의재판 놀이의 배심원으로 서 함께 판결을 내려보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우연한 ‘사고’다. 출장길에 자동차 사고를 내고 시골 마을에 멈춰 선 섬유회사 외판원 트랍스. 그는 어쩔 수 없이 조용한 시골집 한 곳에 머물게 된다. 집주인은 은퇴한 판사로, 판사는 자신처럼 과거 검사, 변호사, 사형집행관이었던 친구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과 ‘모의재판 놀이’를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거의 유일한 활력소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하는 이 기묘한 상황에서, 트랍스는 처음에는 웃어넘기지만 상황에 점점 더 몰입해 간다. 연극은 농담 같던 놀이가 어떻게 ‘진짜 재판’처럼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함께 끌고 들어간다.


박건형 배우의 트랍스는 그가 과거 연기했던 뮤지컬 <시카고>의 변호사 빌리 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 보기엔 트랍스는 세련되고 자신감 넘치는 인물이다. 잘나가는 섬유회사 판매 총책임자,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장처럼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자백할 만한 죄가 전혀 없다고 믿는다. 그러자 검사는 “어차피 누구나 죄가 있다”며, 그의 범죄를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트랍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출세했다고 믿는 외판원 시절부터 현재의 총대리인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성공담을 풀어놓는다. 지금 자리가 전임자의 심장마비로 비어 있었고,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만찬의 풍경 또한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호화로워진다. 수많은 코스 요리에 최고급 와인이 끝없이 이어지는 호화로운 '향연'*이다. 이 식사 자리에 취해 처음엔 서로를 떠보던 이들이 곧 금세 반말을 튼다. 특히 피고인인 트랍스와 그를 기소하는 검사가 제일 먼저 선을 허문다. 마지막엔 모두가 취해 형제처럼 서로에게 기대는 가운데 이 축제의 끝에서 비로소 ‘판결’이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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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과 '법정'이 독일어에선 'Gericht'으로 같은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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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이 무서운 이유는, 트랍스를 무대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그를 데리고 잠시 바깥 산책을 나가, 검사 초른의 교묘한 화술을 경고하며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트랍스는 검사의 수려한 수사학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가 사적으로도, 직업적으로 모두 그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 했다는 사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얼마나 계산해왔는지를 스스로 털어놓는다. 검사는 이 흩어진 정보들을 논리적으로 엮어, “당신은 그를 사실상 죽게 만든 살인자”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기소가 끝날 무렵, 트랍스는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트랍스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인은, 트랍스를 무능한 평범한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누구도 온전히 자신의 행동 결과를 감당할 수 없는 시대라는 논리이다. 이게 실제 재판이었다면 가장 설득적이었을 논리다. 그러나 트랍스는 변호인의 논리를 거부한다. 트랍스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 모의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유일하게 슬퍼 보이는 것은 사형집행관이다. 모의재판 놀이에서 실제로 사형을 구형할 수 없으니, 그에게는 재판이 끝날 때마다 자신은 이미 은퇴하고 기력이 다했다는 것만 상기되는듯하다.


다음 날 아침, 노인들은 관 모양의 식탁 위 목을 매달아 있는 트랍스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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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죄를 뜨거운 확신을 가지고 인정하는 피고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트랩>에서 가장 중요하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라고 느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한편에 숨겨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 이 진실은 양심만이 알고 있다. 문제는, 양심은 쉽게 수치심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선택은 '자기 탐구'에 가깝다. 누군가가 나를 비추어준 거울을 계기로, 내가 놓쳤던 책임과 감정을 새로 돌아보는 과정이다. 그러나 트랍스는 이를 넘어 타자의 이야기에 '압도'된다. 양심은 그 순간 수치심이 되고 만다. 양심은 행동을 돌아보게 하지만, 수치심은 존재를 숨기게 만든다.


사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실제 트랍스가 아니라, 검사 초른의 이야기 속 ‘트랍스’라는 인물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트랍스는 더 이상 양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트랍스는 법적 의미의 죄를 넘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판단까지 타인의 입에 넘겨주고 만다. 양심은 죄책으로, 죄책은 곧 수치심으로 뒤틀린다. 더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인간인가”로 심판의 초점이 옮겨간다.


여기서 법이 건드리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생겨난다. 도덕을 넘어 존재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는 순간 변호사가 아무리 “당신은 이 시대의 피해자”라고 말해도,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이라는 규정은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천재적 범죄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무 힘도 없는 평균적인 피해자보다는 더 견딜 만한 자기 이미지가 된다. 이 선택 뒤에 있는 것은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의 감정과 가치보다 내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양심이 수치심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했다”가 아니라 “나는 결함 있는 사람이다”로 비약한다. 트랍스의 욕망과 죄책, 그리고 수치심은 뒤섞여 그 얼굴 자체가 누구의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가 진짜로 반성했는지, 아니면 ‘가치 있는 인간으로 보이기 위한 죄의 연출’을 택했는지는 끝내 명확하지 않다. 양심이 수치심으로 변모하는 순간, 책임은 자기 성찰이 아니라 자기 파괴와 연결된다. 결국 법은 한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끝까지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연극 <트랩>의 연출과 공간으로 인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모의재판의 배심원이 된다. 만약 진짜로 우리가 선고를 내려야 한다면, 우리는 트랍스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노인 법조인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들의 법복은 이제 사냥 본능이 서린 까마귀의 깃털 옷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관객의 피고인이 되는 것은 트랍스가 아니라 이 노인 법조인들이다.


늘 서울시극단의 작품은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을 내놓는다. 서울시극단의 올해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트랩>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서사에 편입되어 그가 만든 ‘나의 버전’을 연기하고 있는가. 지나치게 도덕을 강요하는 순간, 양심은 금세 수치심으로 변한다. <트랩>은 관객에게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재판하고 있는가.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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