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왜곡하는 이중부정 - 영화 <트루 스토리>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둔 진실, 그 사이 숨어 있는 욕망

by 채수빈


내가 신문을 처음 읽을 때, 엄마는 내게 행간을 잘 읽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한 문장 다음에 오는 문장을 읽으며, 왜 해당 문장이 다음에 나왔는지 생각하는 것.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행간을 제대로 읽었는지 어떻게 알지?’라고 생각했다.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무조건 의심하며 보자’. 그런데 이렇게 의심하며 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결국 내가 의심하고 싶은 부분만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추구미’에 따라 신문을 읽은 셈이다.


MV5BN2IwNTZhMjEtYWViMy00YThmLWFmNWEtZjliZGJjYjAzOTQ4XkEyXkFqcGc@._V1_.jpg


영화 <트루 스토리>는 욕망으로 사실을 바라볼 때 진실은 곧바로 오염돼버림을 말하는 영화다.


영화는 뉴욕타임스 기자 마이클 핀클(조나 힐 분)과 교활한 범죄자 크리스천 롱고(제임스 프랭코 분)가 어떻게 자신의 욕망에 취해 서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는지 보여준다.


기자 마이크 핀클은 기자에겐 큰 명예라고 할 수 있는, 뉴욕타임스의 1페이지를 장식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관객은 곧 그가 사실의 일부를 편집하여 글을 썼다는 걸 알게 된다. 메시지를 강조하는 글을 쓰기 위해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고, 그는 곧바로 타임스에서 잘린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고심하던 차에 그는 황당한 전화를 받게 된다. 한 살인자가 멕시코에서 잡혔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이름, '마이크 핀클'을 가명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


자신의 이름을 훔쳐 쓰던 남자의 본명은 크리스천 롱고. 핀클이 왜 자신의 이름을 썼는지 묻자 롱고는 머쓱하게 웃으며, "당신의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었을 정도로 팬이어서, 내적 친밀감에 그랬다"라고 대답한다. 아내와 세 명의 자녀를 죽였다는 무겁고도 무거운 죄명에 비해, 너무나도 온화한 롱고를 보고 당황한 핀클.


그때 롱고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신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면, 본인이 무죄임에도 수감되어 있는 이유를 오직 그에게만 들려주겠다고. 처음엔 호기심으로 수락했지만, 핀클은 롱고를 인터뷰할수록 그가 정말 억울하게 수감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무죄일까 아닐까?



이중부정과 연상법


True_Story_Still.png

롱고의 무죄 여부는 이 영화를 긴장하게 만드는 중심축이다. 그의 무죄 여부를 알 수 없는 만큼,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의문스럽다. 관객은 핀클처럼 그가 무죄임을 바라게 되지만, 결말에서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핀클이 맨 처음 롱고에게 알려줬던 글쓰기 테크닉은 '이중부정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중부정은 왜 위험할까? 진실을 왜곡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는 B이다"라고 서술하는 것과 "A는 B가 아닌 것이 아니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절대 같은 말이 아니다. 이중부정은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구치소 안에서 롱고의 별명은 '쇼트 스탑(Short-Stop)'이다. 그의 성, 롱고(Long-Go)의 이중부정인 셈이다. 그러나 쇼트스탑은 그의 별명이지, 이름이 아니다. 그는 법정에서 엄연히 크리스천 롱고이다.


그렇지만 롱고는 본인을 친족 살해자 롱고가 아닌 온화한 수감자 쇼트스탑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법정에서 롱고는 마치 챗 지피티처럼 핀클이 알려준 언어의 기술을 고스란히 따라 하며 엄청난 언변을 늘어놓는다. 사실보다 서사를 더 강조한다. 살인자를 동정하는 건 쉽지 않지만, 장난감이 없는 아이는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는 사람들의 '동정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이중부정으로 너무도 쉽게 가능성을 확장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려 한다.


롱고를 보고 있으면 아래 글귀가 생각난다.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를 뜻하는 것은 공들여 찾아낸 모욕 중의 하나이다

-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배심원들 역시 그가 시도하는 모욕을 눈치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변호와 변명은 한 끝 차이다. 진실이라는 한 끝. 변호가 자기의 무고함을 입증하려는 노력이라면, 변명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회피하는 시도다. 그만큼 말은 모호하며 불안정하다.


이중부정이라는 '말장난'으로 인한 무한한 가능성을 조롱하듯, 영화 역시 끝까지 관객에게 롱고의 유죄를 확인사살하지 않는다. 영화 끝까지 관객은 혹시라도 그가 무죄일지 몰라, 하면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보지만 결국 허무함만이 남는다. 경찰이 수사를 다시 진행했는데 롱고가 범인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가 나타난다던지 하는 장면은 없다.


그가 유죄라고 확신하게끔 암시되는 부분을 통해 우리는 직접 결말을 내릴 수 있다. 핀클이 직감적으로 그가 내내 거짓말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좌절하는 장면, 그리고 끝까지 속지 않았던 핀클의 아내가 직접 롱고를 대면해 당신은 허접한 나르시시스트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는 장면이다.



언어 속 욕망을 덜어내는 작업


true-story-jonah-hill-james-franco-04026.png


우리는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때로는 속이고 속임 당한다. 그래서 진실과 허구는 기록에 의존한다. 그 기록 속 욕망이 섞이지 않도록 정화조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자이다.


핀클은 기자였으나 욕망을 위해 사실을 떨구었다. 그는 영화의 초반부터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데 망설임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특종으로 내세우기 위해 취재 내용 일부를 조작한 그는, 뉴욕 타임스에서 해고된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그 선택의 '진실'은 신문 1면에 실리기 위함,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롱고를 만난 후, 그는 다시 한번 진실과 허구를 넘나 든다. 그는 롱고가 말하는 모든 진술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롱고의 서사에 깊이 매료된다. 급기야 본인과 롱고와의 공통점을 많이 느낀다며 그를 이해하고 동조하기까지 한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진실을 재구성하고자 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핀클은 결국 영화의 결말에서 '책'을 낸다. 기사가 아닌 책이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려 했지만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핀클의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롱고의 욕망을 핀클이 완성시킨 것일까? 롱고와 같은 사람의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나의 욕망을 취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거짓말쟁이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인다. 애초에 처음에 롱고가 핀클에게 했던 "당신의 글을 읽고 영감을 받았다"는 롱고의 팬심 어린 말도, 과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나의 욕망을 온전히 알고 있는 자가 가장 무서운 자다. 나의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롱고를 보고 있으면 소위 '이단' 종교들이 생각난다. 종교는 이단을 어떻게 규정할까? 아니, 정확히 종교와 이단은 어떻게 다를까?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동일한 집단 경험의 기록이다. 이는 (종교 안에서) 변치 않는 사실이며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된다. 이때 그 교리를 재해석해서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 이단이 된다. 이 재해석은 보통 해석한 이의 욕망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특히 특정 종교나 교리에 치우치지 않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겠다는 자세는 바람직하나, 이때 각자가 얻은 깨달음에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자기 확신이 지나칠 때 '이단'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언어는, 해석할 여지를 늘 남긴다. 특히 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더욱 구분하기 어려우며 내 욕망이 섞이기 쉽다. 즉, 사기 치기 쉽다. 언어는 진실을 담을 수도, 거짓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둘이 얼마나 얽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쉽게 구분할 수 없는지에 있다. 그리고 기록으로 어떻게 남느냐에 있다.


사실의 기준이 개인이 되는 순간, 진실은 오염된다.



욕망이 탐욕으로 변할 때


조나 힐이 글에 욕심난 기자 마이크 핀클 역을, 제임스 프랭코가 교활한 사기꾼 크리스천 롱고 역을 맡아 열연했다. 두 배우 모두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을 종종 연기해온 바 있다. 이번에도 역시, 조나 힐과 제임스 프랭코는 큰 액션이나 고성이 오가지 않는 영화임에도 눈빛만으로 각자의 욕망을 징그러울 만큼 잘 그려냈다.


사실 욕망이라고 내내 앞에서 썼지만, 탐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의 욕망이 지나쳐 다른 사람을 해치는 탐욕으로 변할 때, 우리는 얼른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탐욕이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롱고의 명대사 두 개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Sometimes the truth isn't believable. But that doesn't mean that it's not true.

가끔 진실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란 뜻은 아니다.

(이 말속에서 간파해야 할 것: 거짓은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지만 거짓이 아니란 뜻은 아니다.)


Sometimes you have to accept looking one way in order to protect something more important.

가끔 더 중요한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이 말속에서 간파해야 할 것: 결국 본인의 탐욕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트루 스토리>는 디즈니플러스에서 시청 가능하다.



<트루 스토리>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1_11_most-of-the-jurors-in-12-angry-men-1024x576.png

12명의 배심원들이 좁은 방에 모여 어떻게 결론을 도출해 내는지 그린 영화다. <트루 스토리>처럼, 진실은 사람들의 동기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루 스토리>는 롱고의 무죄 여부가 영화의 긴장을 만든다. 반면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 배심원들이 증거를 재검토하고 진실을 향해 직접 노를 저어 나아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 또한 배심원들의 방에 함께 있는 듯한 열기를 느끼게 된다.



영화 <댓글부대>

202403222133529557_0 (1).png

기자의 특종 욕망이 소재인 것은 같다. <트루 스토리>는 개인의 욕망으로 진실이 오염되는 것을 보여주지만 <댓글부대>는 얼마나 집단적 가스라이팅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은 욕망을 쉽게 조성한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문화는소통이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남의 이야기에 압도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