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치매 시작일까
우리 모친은 80세 정도 되셨고, 차로 4시간 거리의 지방에 살고 계신다. 자식들은 모두 서울에서 터전을 잡고, 부친도 몇 년 전에 작고하셨다. 젊은 시절 부친의 전근으로 그곳에 정착하신 지 어언 50년 거의 반평생이나 된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자식도 남편도 모두 떠나고, 원래 고향도 아닌 터라 모친은 굳이 그곳에 살 필요가 없어졌다. 입버릇처럼 주변의 친구들도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어 마음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이 외롭다고 하셨다.
모친은 올해 건망증도 부쩍 심해지신 것 같다. 근자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앞뒤 순서가 맥락 없이 엉킨 실타래처럼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나의 암 수술하는 날짜도 잊어버리고, 수술한 다음 날에도 엉뚱한 일로 전화를 걸어오셨다. 동생이 집들이 초대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내가 서울에 가야 하느냐고 누가 이사를 갔는지 전혀 기억을 못 하셨다. 추석에 내려갔을 때는 말끝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우울한 명절을 보냈다. 또 누가 당신의 돈을 훔쳐갔다고 경찰에 신고한 사건도 있었다. 그 돈은 당신의 가방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서울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까, 자식들과는 절대로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대신 지척에 10평짜리 원룸이라도 한 칸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가족회의를 한 결과 시골집을 정리하고, 서울에 집 한 칸을 마련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집의 조건은 '(1) 나중에 거동이 더욱 불편해질 수 있으므로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한다. (2) 외로움을 많이 타니 사람이 많은 활기찬 동네여야 한다. (3) 먹는 것도 중요하니 시장이 가까워야 한다. (4) 우리가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여야 한다.' 이렇게 네 가지로 압축되었다.
올해 모친의 생신을 서울에서 차려드리기로 했다. 모친은 자식들 집을 하루씩 돌아가며 주무시거나 순례하셨다. 서울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 자식들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셨다. 우리는 모친이 서울에 오셨을 때 마음에 드는 동네나 집을 구경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고 계약까지 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우리는 모친을 호위하고 부동산 사장을 따라 집을 보러 다녔다. 마침 위의 네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집을 발견했다.
시골의 집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작지만 모친은 혼자 사는데 어떠냐며 아늑하고 좋다고 하셨다. 망원시장이 코 앞이고, 우리 집과도 가까워서인지 매우 흡족해하셨다. 같이 따라간 식구들도 괜찮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 집을 구입할 수 돈이 있는가였다. 전세를 끼고 사면 얼마가 더 필요한지 부동산 사장이 금액을 제시하자, 모친은 가능하다며 '사자, 사자!' 하며 흔쾌히 그 집을 계약하자고 하셨다. 일단 500만 원을 집주인에게 입금하고 가계약을 했다.
또 하나 남은 문제는 일시적 1가구 2 주택자가 되어 시골집을 1년 안에 팔아야 양도세가 비과세 된다는 점이었다. 서울 집이 조정대상지역이기 때문이다. 지은 지 25년이 된 시골집은 땅값에 준하여 싸게 책정하면 쉽게 매도할 수 있다. 그러나 원룸형 집이라는 수익형 부동산임을 감안하면 최소 1~2억은 더 받을 수가 있다.
부동산 사장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전국에 시골집의 광고를 올렸다. 그 사이에 모친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에 대한 미련과 준비 없이 한 성급한 결정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 모양이다. 그러더니 아무래도 그때 귀신이 씌어서 그런 것 같다며 무르자는 것이다.
몇십 년 간 공들여 가꾼 당신의 터전이며, 가족이 함께 살아온 역사와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니 얼마나 소중할까. 얼마나 만감이 교차할까. 그 애착이야 오죽하실까. 표현을 안 했지만 우리들도 모친의 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모친의 가업을 잇겠다거나 그 시골집을 관리하겠다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 모친의 심신이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손수 재산을 정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 우리는 계속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부동산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현재 내놓은 가격에서 2,000만 원을 다운하자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시골집이 팔려야 모친도 미련을 빨리 떨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만장일치로 수락했다. 모친을 설득시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정 안되면 다운시킨 만큼 우리가 돈을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그 덕분에 1,500만 원만 다운시킨 가격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친이 집 보러 온 사람에게 설명을 아주 잘하셨다고 한다. 서울 집을 계약하고, 시골집을 내놓은 지 일주일 만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실 요즘 같은 때에 오래된 시골집을 큰 손해 안 보고 그렇게 빨리 팔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모친은 안 팔렸을 때는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시더니, 막상 팔렸다고 하니 또 다른 인지적 혼란 증상을 보였다. 손주고 자식이고 시도 때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반복적으로 같은 말로 물어보셨다.
"내가 서울 집을 계약했다고? 언제? 얼마에?"
"우리 집이 팔렸다고? 얼마에? 아이고 너무 싸게 팔았네!"
"너희들이 짜고 나를 속이고 사기 친 거 아니냐?"
"매달 200만 원이 넘게 나오는 집을 괜히 팔았네. 귀신이 씌었나 보네. 아이고..."
모친은 이 사건으로 스트레스가 컸는지 기억력의 저하와 인지능력이 더 떨어진 증세를 보였다. 혼자 시골에 계시다 보니 망상 증상까지 겹친 것 같다. 양쪽 집의 잔금 처리 일정과 관계없이 하루빨리 서울로 모시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검사도 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루 대여섯 번씩 울리던 전화가 일절 오지 않는다. 넌지시 알아보니 45평대의 짐을 10평대의 짐으로 줄인다고 정리에 몰두하고 계신다고 한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우울증이라도 생길까봐 조용히 계시는 게 더 걱정스럽다. 며칠 후 설에 내려가면 가족회의를 다시 열어 양단간의 결정을 내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