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칼협’이 잊게 만드는 것
'누칼협'은 최근 공무원 임금 처우 문제가 화두에 오르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형성된 신조어이다. 의미인즉슨 ‘누가 그 직업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어?’로서 해당 집단 또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 해당 주체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니 받아들이라며 조롱하는 뜻이다. 이후 ‘누칼협’은 다양한 사회 이슈에서 이해 당사자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 표현을 보았을 때 무척이나 아찔했다. ‘누칼협’은 작금의 사회구성원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이해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얼마나 단절시키고 있는지 보여주는 표현인 동시에, 그러한 인식을 더욱더 날카롭게 벼리고 확산시킬 도화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절대적인 대전제를 잊게 만든다. 바로 우리는 모두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의 행위 모두는 사회적 행위라는 사실이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으며, 반대로 크든 작든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공무원 임금 논란을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세간에서 소위 최저임금도 안된다는 9급 저년차 공무원들의 임금은 사실 여타의 수당을 제외하고 계산된 것으로서 근무 여건과 계산 방식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추산 연봉은 대략 2천만 원 중후반대로 추측된다.
2022년 최저임금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대략 2,300만 원이다. 한편 고용노동부가 제공하는 임금직무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5~29세 대기업 종사자 평균 연봉은 약 3,400만 원이다.
그렇다면 공무원 임금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 어디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며, 그들이 비교 기준은 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생각해볼 수 있다. 공무원 임금 논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공무원, 공기업 등 소위 ‘철밥통’만을 바라보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 1997년 IMF 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 연이은 경제 이슈와 그로 인해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고용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겠지만 8,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무원은 그다지 유망한 직업이 아니었다. 소위 더 나은 선택지를 가지기 어려운 이들이 선택하는 만만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 열풍이 불고, 경쟁률이 높아지며 이전보다 하향 지원으로 공무원 입시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대기업 내지는 강소기업에 지원할 인재들이 공시에 뛰어들었다. 즉 그들의 비교 기준은 최저임금이 아니라 대기업 등의 초봉에 있는 것이다.
‘노력에는 반드시 보상이 뒤따른다’라는 개발도상국에나 어울리는 믿음이 한국의 기형적인 경쟁 문화와 만나며 왜곡된 신념을 만들었다. 치열한 입시 경쟁, 입사 경쟁을 뚫고 나왔으니 나는 그만큼 우수한 인재이며, 그에 맞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신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이 임금은 입사경쟁률로 정해지지 않는다. 특히나 공무원 임금은 여타의 임금 가운데서도 그 결정 방식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현실과 앞서 설명한 왜곡된 신념이 충돌하며 현재의 논란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공무원 임금 논란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들의 연봉이 실제 최저임금에 비해 절대 낮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며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듯 힘든 경쟁을 뚫고 공무원이 되었지만 정작 그 처우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비록 불운하고 안일한 선택을 했을 수 있으나 그들의 선택에도 분명한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금리가 오르며 그 문제가 커지고 있는 부동산 영끌족의 이자 부담 문제는 어떠한가. 수년 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며 부동산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 취급 받고, 이번이 부동산으로 돈 벌 마지막 기회, 내 집 마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옥죄었다.
또 다른 예는 코인 열풍이다. 부동산 투자와 같이 코어 자금이 필요한 투자 시장에 뛰어들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코인은 현재 뛰어들 수 있는, 그리고 대박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투자 시장이었다. 금융의 탈을 쓴 이 신상 투자 시장은 기존의 경제 작동 방식과 철저히 구분되어 개인 또는 집단의 욕심에 따라 요동쳤다. 그 도박장에서 돈을 번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 똑똑한 사람. 돈을 잃은 사람은 운이 나쁜 사람, 미련한 사람 취급 받았다. 아무도 누가 그들을 그 절벽으로 내밀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과 피해들이 ‘누칼협’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실제로 단 한 번도 ‘보이는 손’이 그들의 등을 떠민 적은 없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그들의 손실에 대해 책임지거나 공감하거나 함께 해결하려 나서지 않도록 만든다. 타인에 고통에 공감하거나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면죄부가 되어준다.
더 큰 걱정은 이 ‘누칼협’이 앞서 거론한 직업, 투자 등, 비교적 명확한 이해관계의 문제에서 확장되어 모든 사회문제에 따라붙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 걱정은 얼마 전 연이은 자연재해에 따른 피해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누칼협’ 댓글이 적힌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 누가 그런 지역에 살라고 강요했느냐는 식의 주장이었다.
만약 이 심리적 거리두기가 만연해진다면 우리는 그 어떤 문제도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치 시대를 묘사한 유명한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처럼, 우리 각자가 처한 문제에 공감해주고 함께 나서 줄 모든 이가 사라진 뒤에는 너무 늦다.
물론 모든 문제를 공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이건 간에 그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해 버리면 문제의 본질을 찾아내고 해결할 기회가 영영 멀어지게 된다.
거듭하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회 위에 존재하며 그 어떤 작은 문제도 사회와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에 따라 개인의 책임이 사회의 책임보다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의 책임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생각하고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개인의 영역에서 책임을 다하듯, 사회구성원은 사회의 영역에서 그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