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인간 ‘비정규직’
‘가성비’, 한정된 자원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얻어내기 위해 고민하는 소비 습관에서 나온 단어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단어에 담긴 우리의 고민은 단어의 역사보다 분명 오래되었다. 같은 가격이면 좋은 물건, 같은 물건이면 저렴한 가격. 많은 이들이 의식주를 막론하고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가성비를 얻기 위해 애쓴다.
‘비정규직’, 기업이 찾아낸 가장 쉽고 빠른 가성비 상품이다. 같은 일이라도 임금을 덜 주기 위해, 덜 중요하다 싶은 일은 훨씬 더 적은 임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가성비 노동자다.
비정규직의 역사는 김영삼 정권 당시 생산과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IMF 대공황을 지나며 국가와 기업은 모두가 다 같이 생존하는 그림은 진작에 포기하고 대신, 가장 많고 대체하기 쉬운 부분 즉, 노동자부터 잘라내어 ‘기업’이라는 껍데기만은 살려내는 그림을 선택한다.
당시 시시각각 무너져 내리는 경제 상황 가운데 당장 우리 회사도 내일 부도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노동자들은 ‘유연화’라는 모호한 단어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회사도 살고 우리도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정치인과 화이트칼라의 말을 믿었다.
근로계약서만 다시 쓸 뿐, 나머지는 다 똑같다고 했다. 계약서에 적힌 회사 이름이 다른 것, 계약기간이 2년 뒤인 것 등은 법을 지키기 위한 사소한 문제이며 지금까지처럼 그대로 쭉 일할 수 있다고 했다. 막상 2년이 지나자 누구는 쫓겨나고, 누구는 같은 계약서에 다시 서명했다. 정작 그렇게 동료의 등에 칼을 꽂은 화이트칼라도 노동유연화의 다른 무기 ‘정리해고’의 칼을 피할 수는 없었으니 참 웃지 못할 현실이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흘렀다. 이제 비정규직은 거짓말을 넘어서 만연한 꼼수가 되었다. 비상시 업무에만 비정규직 고용이 가능하다는 법을 2년만 쓰고 자르는 식의 꼼수로 회피했다. 그 꼼수를 막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업무를 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하자, 공장 내에 벽을 치거나, 업무를 분리하는 식으로 구분 지었다. 그러고는 비정규직에게 ‘너희도 말 잘 듣고 일 열심히 해야 급여 좋고 복지 좋은 정규직 시켜준다’고 속이며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한국의 모든 회사가 이런 꼼수를 부리기 시작하자 노동자 안에도 계급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고급인력인 정규직, 대체 가능한 저급인력인 비정규직으로 나뉜 것이다. ‘직업에 귀천 없다’는 옛 격언을 뒤엎고 직업에 귀천을 만들어 구분했다. 높은 커리어를 갖추고 힘든 시험을 통과한 정규직은 그 성취에 취해 자신들이 대단한 지위를 획득한 마냥 비정규직 차별에 앞장섰다. 대부분 취준생의 목표는 특정 직업이나 분야가 아닌 ‘정규직’이 되어버렸다.
이 풍토가 너무 자연스러워진 나머지 우리가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 사무실 내근직이나 공장의 생산직이나 청소부나 구내식당 요리사도 전부 회사의 운영을 위해 상시로 고용되어야 할 필수인력이라는 것이다. 그 일이 쉽고 어렵고, 학력, 자격증, 경력 등을 필요로 하는가 아닌가와 무관하게 본래는 그들 모두가 정규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가 이런 꼼수를 십분 활용하도록 구멍을 뚫어준 덕분에 기업은 가성비가 뛰어난 노동력, ‘비정규직’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1028/116194568/1
지난달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법을 어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같은 현장에서 근무시켰던 현대기아차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패소했다. 즉, 그 노동자들은 꼼수를 통해 파견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탈을 썼을 뿐, 실상은 그 공장의 정규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이런 경우 법원은 그들이 정규직으로 고용되었을 경우 받았을 임금과의 격차를 지급하도록 한다. 기업들이 그 돈 냈다간 당장 공장 문 닫을 것처럼 난리지만, 지금까지 그 때문에 문 닫은 회사 한 번도 못 봤다. 나아가 그 임금 차액이 그동안 비정규직 꼼수를 부리며 얻은 이익에 비하면 절대 크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런 기사들을 비롯해 비정규직 관련 기사를 볼 때는 그전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댓글창에 또 얼마나 무자비한 차별과 혐오성 발언이 넘쳐날지 그려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오해와 망발에 반박해보려 한다.
‘누구는 어렵게 노력해서 정규직, 누구는 떼써서 정규직?’
첫째, 애당초 100명을 상시 고용해야 할 회사가 돈 아끼겠다고 반은 정규직, 반은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차별 대우한 것이다. 제품의 조립, 설비의 청소, 시설의 경비관리 등이 2년 만 필요하고 없어지는 일인가? 그들의 일이 상대적으로 비전문적이거나 그들이 상대적으로 저학력이라고 해서 차별적으로 노동 할 이유는 없다.
둘째, 법원의 판단은 명료하다.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가 사실상 2년 이상 상시 고용되어 있거나, 정규직과 동일 현장, 동일 업무를 하는 등의 조건이 갖춰진다면 그들은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떼를 써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다. 원래 그들의 것이어야 했던 것을 되찾아갈 뿐이다.
‘해외는 이미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 없이 노동유연화 되어있는데요?’
국가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유럽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대우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일본이나 미국이 우리 못지않게 해고가 자유롭고 차별도 심하긴 하다. 그래서 자랑스러운가? 우리도 남들처럼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회사가 살아야 나라도 산다! 비정규직이라는 완충제가 있어야 경제불황 시 회복탄력성도 높아진다!’
왜 노동자의 삶, 그 노동자가 책임지는 가정경제가 기업경제의 완충제가 되어주어야 하는지 윤리적인 고민부터 해봐야 한다. 심지어 IMF 당시 실질적인 타격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을 활용하여 회복을 한참 뛰어넘는 이익을 남긴 기업이 허다하다.
‘그렇게 억울하면 진작 노력을 했어야지!’
첫째, 각자의 노동력에 대한 평가 즉 급여는 엄연히 그들의 생산성과 기여도 등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각자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학력, 자격증, 전문지식 등이 반드시 생산성으로 결부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같은 일을 하는데도 차별대우 받는 비정규직이 허다하다.
둘째, 노력의 성과가 제한될수록 건강한 사회다. 노력의 성과가 개인이 희망하는 직종에서 종사하는 것 수준을 넘어서 소득을 결정짓고, 계급과 계층을 결정지은 결과 계층 간 사다리가 없어지고 독점과 차별이 만연한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