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삼대가 덕을 쌓으면 주말 부부를 할 수 있는 말과 더불어 마터호른 산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특정 배급사의 영화 오프닝에서는 웅장한 산을 배경으로 수많은 별이 날아오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산이 바로 스위스 체르마트에 있는 마터호른산이다. 마치 은밀한 베일에 싸여 있는 듯 구름 뒤에 숨은 봉우리는 그 자태를 보기가 어렵다. 어찌나 마주하기 어려웠으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마터호른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민영과 태혁은 신혼여행으로 간 스위스에서 선명한 마터호른 봉우리를 보고 올 수 있었다. 민영은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했다. 그러나 감사는 마터호른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신혼여행 후 민영은 원치 않는 두 번째 감사를 해야 했다. 바로 주말 부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민영이 주말 부부라고 말을 하면 연차가 오래된 결혼 선배들은 곧바로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주말 부부가 주는 이점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며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이니 지금을 실컷 즐기라고 한다. 민영은 자신의 심정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그들의 감정을 느끼며 한바탕 웃는다. 그러다 문득 태혁이 보고 싶어 민영의 입꼬리가 씁쓸해진다. 잠에 들기 전 알람을 맞출 때 지금 자면 몇 시간을 잘 수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몇 밤을 더 자야 태혁을 만날 수 있는지 세는 것이 어느새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과가 되었다. 오늘은 아직 슬픈 화요일이다. 태혁을 보려면 3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10년 간 친구였던 민영과 태혁은 모두를 놀라게 하며 세기의 연애를 시작했다. 서울에 사는 민영과 대전에 사는 태혁은 피어오르는 이 뜨거운 감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장거리 연애를 청산하고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어 매우 신속하고 빠르게 결혼에 골인했다. 삶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오는 법이다. 민영이 대전으로 회사를 옮기려고 했지만, TO가 나지 않아 인사 교류가 불발되었다. 민영과 태혁은 결국 주말 부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그와 동시에 주말 부부 생활은 비통했다. 매일매일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주말에만 봐야 했기 때문이다.
주말 부부의 비애는 생일 주간에 가장 크게 나타난다. 생일이 주말에 껴있지 않으면 평일에 외롭게 생일을 보내야 한다. 생일 전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축하해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일 당일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민영은 태혁을 위한 생일상을 직접 차려주고 싶어 일주일 전부터 메뉴 구상을 시작했다. 태혁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생일상을 차릴 예정이다. 태혁은 아침잠이 많은 편이니 몰래 생일상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마트로 가서 장을 봤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미역국 고기를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로 산 것이다.
부랴부랴 인터넷을 쳐보니 돼지고기로 미역국을 끓인 사례가 꽤 있었다. 그래. 한번 도전해 보자. 떨리는 마음으로 요리를 준비한다. 보글보글, 냄새는 괜찮다. 국물 간을 보니 나쁘지 않다. 이만하면 됐다. 안심한 민영은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하다 어디선가 끈적한 시선을 느낀다. 조용히 고개를 들자 갓 캔 감자가 졸린 눈을 비비며 서있다. 갓 캔 감자는 갓감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갓감은 민영이가 태혁이를 부르는 별명인데, 막 아침잠에서 깨어난 꼬질꼬질한 태혁을 너무나도 애정하여 지어준 별명이다. 태혁은 생일상과 민영을 번갈아보며 좌우로 궁뎅이를 한참이나 씰룩거리고는 식탁 앞에 앉았다. 제육볶음, 달걀말이 등을 먹으며 연신 맛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의 숟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숟가락이 미역국으로 가자 민영은 더 늦기 전에 고백했다. 사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임을.
태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국물을 맛보고는 맛있다고 말했다. 태혁이 계속 먹자 안심한 민영은 함께 미역국을 먹기 시작했다. 아까 간은 봤지만 미처 먹어보지 못한 돼지고기도 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불길한 맛이 감돌았다. 더 이상 씹지 못해 살짝 벌어진 입과 놀란 눈으로 황급히 태혁을 바라봤다. 그제서야 태혁의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미간에서는 온갖 아우성이 느껴졌다. 다정한 태혁은 민영이 말릴 새도 없이 입안에 가득 찬 비린내를 견디며 국그릇을 다 비워버린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그 비린내는 역설적으로 민영을 향한 태혁의 사랑이자, 또 다시 떨어져 지낼 한 주간을 기다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