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타들어가는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에 소개팅이 잡혔다. 인생 첫 소개팅이었다. 소개팅의 발단은 이러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왜 애인이 없느냐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SNS로 서로의 친구 목록을 한 명씩 훑어보다가 그중에 친구들의 냉철한 판단을 거쳐 검증된 한 명과 소개팅을 하는 걸로 끝이 났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는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나의 옆자리를 채워주기 위한 친구들의 눈물 나는 우정과 끝내주는 추진력 덕분이었다.
때는 소개팅 전날. 나는 첫 소개팅이라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옷은 뭘 입고 가야 할지, 만나서는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러다 날밤 새울 거 같아 친구들에게 SOS를 쳤다. 참고로 도움을 청한 친구들은 소개팅 주선자인 보노, 금손을 보유한 친구인 영이다. 보노와 영을 만나자마자 나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나 어떡해. 소개팅 취소하고 싶어. 왜 한다고 했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꺼져가는 풍선에게 바람을 불어넣듯 그들은 나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심어줬다.
나는 화장에 자신이 없어 뷰티계의 상위권 유튜버만큼이나 금손인 영에게 화장을 부탁했다. 영은 미리 화장을 연습해 보자며, 알록달록한 색조 화장품과 다양한 크기의 브러시를 바닥에 진열해 놓았다. 그러곤 나의 얼굴과 색조 제품들을 수차례 번갈아 보며 나에게 어울릴 만한 색조들을 척척 골라내었다. 마치 전쟁에 나가기 전 무기를 고르는 비장한 여전사처럼 보였다. 그렇게 골라낸 색조들로 화장을 끝낸 영은 “생각보다 발색이 약하네. 내일은 더 진한 걸로 써야겠어.”라고 말하며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로 바라본 나는 '누구신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예쁜 내가 있었다. 평소와 다른 나의 모습에 흡족한 나는 영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음에 든다고 칭찬을 했다.
대망의 소개팅 날, 이른 아침부터 영과 보노의 합작으로 화장을 완성하고 머리를 푸네 마네, 신발은 이거 신을까 저거 신을까 난리 법석을 떨며, 그들의 힘찬 응원을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 나와 상대방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 중간 지역에서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 만남의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아냐, 이것도 좋은 경험이지'라고 두 개의 자아가 도착할 때까지 치열하게 싸워댔다. 야속한 기차는 끝내 만남의 장소로 나를 태워다 주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나와 상대방은 서로를 쉽게 찾기 위해 사전에 입고 온 옷의 색상을 미리 알려줬다. 나는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롱 원피스를, 상대방은 검은색 상의에 갈색 바지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다가 알려준 정보랑 일치하는 남자가 역 바로 앞에서 서있는 걸 발견하였다. 구릿빛 피부에 곱슬거리는 머리를 한 귀여운 남자였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했다. 역시나 첫 만남에는 고장 난 로봇처럼 쭈뼛거리는 나는 상대방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차! 후회를 하기엔 나의 손은 이미 건네진 후였다. 눈인사만 할 것이지, 업무상으로 만난 사이처럼 악수는 왜 했을까.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만나기 전 찾아둔 식당으로 갔다.
내가 먹고 있는 게 음식인지, 음식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분간이 안될 만큼 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색해서 질식할 거 같았다. 내가 이토록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어떻게든 정적이 생기지 않게끔 상대방의 말에 열심히 반응을 하고, 머릿속은 계속해서 다음 주제를 생각했다. 어색함에 오만소리를 다 한 거 같아서 뒤늦게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말은 이미 뱉어진 후였고, 다시 주워 담기엔 내뱉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는지라 나중엔 '에라이, 될 대로 돼라.'식으로 더 구구절절 말을 했다.
모든 데이트 코스가 그러하듯 밥을 다 먹은 후에는 카페로 갔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먼저 화장실을 갔다. 밥 먹는 동안 치아 사이에 낀 음식물은 없는지, 화장이 나의 기름과 만나서 무너지진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도 금손인 영이 기름을 만나도 화장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파우더칠을 해준 덕분에 화장은 잘 유지되고 있었고, 치아에 음식물이 낀 채 웃은 대참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재정비를 마친 나는 다시 심기일전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주고받은 대화 덕분인지, 어색한 공기에 익숙해졌는지 카페에서는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소개팅은 꽤 흥미로운 일이자 어려운 일이다. 짧은 만남을 통해 마음이 맞으면 인연이 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남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소개팅은 전자가 되길 바랐건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상대방이 궁금하여 더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돌아온 건 친구로 남자의 거절 멘트였다. 결과에 수긍할 수 없었던 나는, 이유를 하나둘 생각해 보았다. 음식을 깨작깨작 말고 복스럽게 먹었어야 했나? 실은 체할 거 같아서 못 먹었는데. 어색함에 헛소리를 남발했나? 아, 그건 인정. 지나간 시간을 곱씹을수록 아쉬움만 남았다. 난 아직 보여줄 게 많은 사람인데, 나란 사람을 더 만나보지도 않고 친구로 남자는 말을 한 상대방의 판단이 섭섭했다. 내 인생의 첫 소개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이번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 있었다. 다음 소개팅 때는 편안한 속을 위해 밥이 아니라 커피를 먹어야겠음을, 어색한 순간이 찾아와도 입을 다물고 한숨 쉬어가기를. 무엇보다 나의 연애 사업에 진심으로 응원해 준 친구들의 사랑을. 전날 밤부터 미리 나에게 어울릴 화장을 고심해 준 영, 내가 떨린다고 하니 소개팅 당일 아침까지 나의 곁을 함께해 준 보노, 입을 옷이 없다면 흔쾌히 자기 옷을 빌려주겠다고 한 용이가. 이토록 자상한 친구들이 나의 곁에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다음 소개팅을 열심히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