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픈 곳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당신에게 자꾸만 물음표를 던지게 되네요. 알고 싶은 것이 많아요. 당신이 제게 어떤 물음표를 던질지도 알아요. 당신이 궁금한 것을 대답해드릴게요. 저희 부모님은 건강하시고요. 늘 그랬듯이 저와 동생은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 저는 아직 주말 부부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긴 한데. 걱정하지 마세요. 올해는 꼭 회사를 옮길 수 있을 거예요. 동생과 올케는 너무나도 귀여운 아기를 낳았어요. 당신이 봤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예요.
저는 생각보다 당신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해요. 그 사실이 가끔 저를 울게 만들어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제게 당신은 여름 같은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여름마다 새콤달콤한 자두를 보내줘서 그랬을까요? 무더운 여름이 될 때면 당신의 집으로 놀러 가서 그랬을까요? 당신의 집은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어요.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려요.
대청마루에서 당신의 무릎을 베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잠들었던 때가 문득 그리워요. 당신의 손길이 가만히 다가와 제 이마에 닿는 순간을 좋아했거든요. 아! 그때도 좋았어요. 저랑 동생이 뻘뻘 땀을 흘리며 마당을 뛰어놀고는 잠시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죠. 당신이 어느새 다가와 수박을 정갈하게 자르고는 우리에게 먹여줬어요. 우리는 과즙이 입 주변과 목을 타고 내려와 끈적해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먹었죠. 당신은 개구쟁이 남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수박을 더 잘라주었죠. 그때 먹은 수박의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래서 제가 수박을 좋아하나 봐요.
저는 당신의 집을 참 좋아했어요. 넓디넓은 대청마루가 시원했고, 창호지를 바른 문들이 매력적이었거든요.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동그란 문고리도 신기했죠. 그래서인지 저는 한옥 카페를 제일 좋아해요.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고 그랬나 봐요. 어머나! 갑자기 그 일도 떠오르네요. 저랑 동생이 당신의 집 창호지 문을 모조리 뚫어놨던 일이요. 침을 바른 손가락을 창호지에 갖다 대기만 해도 녹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동생과 대결한답시고 그 모든 문을 뚫어놓다니. 아직도 죄송하네요. 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것도 일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이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신기해요. 하다못해 주의라도 줄 법 한데.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집에 갈 때마다 철없이 우리의 흔적을 남기곤 했어요.
우리가 창호지를 뚫는 장난을 치지 않는 나이가 될 때쯤 더 이상 당신의 집에 가지 않게 됐어요. 엄마, 아빠의 일이 너무 바빠졌거든요. 저와 동생이 내려가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선뜻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모님 없이 내려간다는 것이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이제야 겨우 용기가 생겼는데 당신은 기다려주지 않았네요. 언제까지고 당신이 기다려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됐어요.
자주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당신은 늘 저희의 일상을 궁금해했는데. 사는 게 너무 바빴나 봐요. 그게 뭐라고. 5분만 시간을 내면 될 것을. 지나간 회한들이 가끔 저를 힘들게 해요. 전 언제쯤이면 당신 이야기를 할 때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저 웃으며 당신을 떠올릴 수 있는 때가 오긴 할까요. 제가 못한 것들만 자꾸 생각나요. 당신에게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당신에게 저는 과연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당신에게 저는 정말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을까요?
당신이 떠난 대청마루에 앉아 모든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당신은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신이 여기에 머물며 바라본 일상들이 부디 외롭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다 자두나무에 눈길이 머물렀어요. 매년 당신이 보내줬던 자두가 여기서 나온 거네요. 일어나서 자두나무를 쓰다듬다 위를 바라봤어요. 꼭대기에 있는 가지에는 손이 겨우 닿더라고요. 나보다 작았던 당신은 이 자두를 따느라 무척 힘들었겠죠. 그럼에도 당신은 묵묵히 이 모든 것을 해냈어요.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에 여름은 늘 기대되는 계절이었거든요.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거든요.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보기만 해도 이내 눈앞이 흐려지지만,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낳아 저를 할퀴고야 말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당신을 추억해요. 당신이 걱정하지 않도록 잘 지내고 있을게요. 우리 엄마도 제가 잘 챙기고 있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약속해주세요. 내내 아프셨으니 이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하겠다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때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겠죠. 저를 만난다면 제일 먼저 두 팔 벌려 꼬옥 안아주세요. 이번에는 제가 수박을 맛있게 잘라드릴게요. 사랑해요. 할머니.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