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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May 21. 2024

영혼의 단짝

소란

27년간 경상도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무심코 넣은 서울의 직장에 붙어버려 반강제로 독립을 해야만 했다. 당시 지방에 살던 사람으로서 서울은 도도하고, 깍쟁이들이 사는 도시라는 편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런 곳에 홀로 상경을 하여 자취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인 킴에게 서울에 가서 같이 살자고 꼬셨다. 마침 킴도 익숙한 집을 떠나 살고 싶은 데다가, 일자리를 구해야 했기에 나의 꼬심에 흔쾌히 넘어와줬다. 그렇게 나와 킴은 좁디좁은 원룸에서 월세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서울살이는 우리에게 삶의 팍팍함을 안겨주었다. 턱없이 적은 월급, 비싼 월세, 높은 물가, 지옥 같은 출퇴근길 등의 이유로. 가난한 사회초년생이었던 우리는 주로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각자 또는 같이 무언가를 하면서. 좁은 원룸에서 둘이 부대끼며 살다 보니 같이 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킴의 모습이 보였다.

킴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 그래서인지 알고 있는 지식이 참 많다. 가끔은 내가 '이게 뭐야?'라고 물으면 척척박사처럼 설명을 해준다. 간혹 본인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인터넷 검색을 해서라도 나에게 알려준다. 다정한 킴의 설명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사를 킴을 통해서 보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도 든다. 그럼 내가 보고 싶은 이야기만 보지 않고 내가 관심 없는 분야에도 어떻게든 알게 될 텐데 말이다.


킴은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킴을 보고 있으면 배고프지 않은 사람도 식욕이 당기게 한다. 그리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술도 잘 마신다. 킴은 술이 들어가면 흥이 오른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의 사람인지라, 흥이 잔뜩 오른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술을 물처럼 마시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는 말려야 한다. 그것은 킴이 취했다는 거고, 머지않아 필름이 끊긴다는 신호다. 술을 잘 마신다는 거지, 취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만성 비염을 앓고 있어 비염의 심함 정도에 따라 코골이 소리도 비례하였다. 한번은 감기에 걸려 코가 꽉 막힌 날이었다. 코골이가 심할 것으로 예상되어 킴에게 미리 나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킴은 '너의 코골이가 이제는 자장가같이 들린다고, 걱정 말고 자'라면서 나를 안심시켜줬다. 가족도 이렇게까지 말해주지 않을 거 같은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가끔은 킴이 여자여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킴이 남자였다면, 나는 열렬하게 구애를 하며 꼬셨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킴이 너무 열심히 살아서인지 마음의 병이 생겼다고 말을 해왔다. 나는 킴의 말에 그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무슨 말을 해도 킴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았다. 증상은 어떤지, 병원에서 상담한 내용은 어땠는지 담담한 어투로 말하는 킴을 보며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동안 함께 즐겁게 논 시간 뒤로 혼자서는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냈을 킴이 상상되어서, 나는 왜 그동안 킴의 힘듦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한탄스러웠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킴에게 다 털어놓았는데, 나만 넘치도록 킴의 위로를 받은 거 같아서 서글폈다.


나에게 킴은 언니이자, 가족이자, 동반자인 친구다. 항상 나는 무언가를 할 때마다 킴과 함께 했다. 대학 생활, 취업 준비, 서울에서의 자취 등을.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아 못하고 있을 때 킴은 나에게 용기를 심어줬다. '왜 못 해? 할 수 있어. 일단 하자.'라고. 이처럼 킴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을 잘한다. 이제는 내가 킴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줘야겠음을 다짐한다. 킴이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묵묵히 킴의 곁을 지키며 기다리고 응원해야겠음을.


나는 킴이 지금보다 웃을 일이 더 많아지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로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하며 영혼의 단짝으로 함께 하기를.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면 나를 찾아주기를. 그러면 나는 온 힘을 다해 킴을 웃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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