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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드스피크 May 28. 2024

타임머신

넴릿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면 언제로 가서 뭐하고 싶어?”

​​

“초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원없이 놀아야지!”

아직도 놀고 싶은 이가 기다렸다는듯이 바로 대답했다.

“딱 한달 전으로 돌아가서 삼성전자 주식 왕창 살거야.”

요즘들어 파란색만 보인다고 울상짓는 이가 못내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나는 고3때로 갈래. 그리고 정신차리고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아.”

매일매일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는 이가 덤덤히 말했다.​

어서 말해 보라는 이들의 재촉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음…… 잘 모르겠어. 너무 어렵다.”

터무니없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한결같은 대답을 던지며 딴청부렸다. 때로는 더 이상 묻지 마라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칼같이 대답할 때도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면 다시 겪어야 하는게 싫어서 난 안 돌아갈래. 타임머신이 필요없어.”

퉁명스레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딱 하나 있다. 갓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수술을 받았고 며칠 동안 중환자실에서 누워 지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

기말고사 기간이 막 끝났다. 곧 다가오는 겨울방학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른 명에 가까운 열일곱 살 아이들로 시끌벅적한 작은 교실에서 나만이 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한 느낌을 매일 맞닥뜨리며 지낸 지가 어느덧 십 여년 넘게 훌쩍 지났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소외된 이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쓸 새도 없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마음과 달리 야속하게 새해는 어김없이 밝아왔다.

대학병원에서 보청기를 착용해도 반응이 없었고, 달팽이관 안에 내부 칩을 삽입하여 전기적 자극을 받으면서 들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는데도 청력이 회복되지 않았던 내게 뇌간을 직접 자극해주는 뇌간이식술을 권유했다. 오랫동안 떨쳐낼 수 없었던 그 이질감이 어쩌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머리를 싹 밀었다. 그리고 수술대 위에 올라섰다.

얼마나 잤는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눈을 힘겹게 떴다. 시력이 나빠서 새하얀 천장마저 뿌예보였다. 마치 뿌연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시계로 추정되는 물체가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알이 두꺼운 안경이 절실히 필요해서 손을 뻗어보지만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가족한테 모든 소지품을 맡기고 맨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게 갖고 있는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눈살을 찌푸려보고 얼굴도 이리저리 찡그려보지만 작은 시곗바늘이 보일 리가 만무했다.

끝내 포기하고 눈을 굴려 천천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등과 팔에 링거줄들이 잔뜩 엉켜있는 채 꽂혀있고, 코에 인공호흡기가 달려있고, 밑에 소변줄도 걸려있는 느낌이 들었고, 입 주위에 알 수 없는 약물들이 뒤섞인 채 누렇게 굳어있는 듯 했고, 입 안에 씁쓸하고 비린 맛이 맴돌았고, 머리에 붕대를 얼마나 칭칭 감아놨는지 고개가 들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창문조차 없어서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형광등 아래서 한동안 누워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들이 한참 보이지가 않았고 1인 중환자실에 혼자 달랑 남아있는데 너무나 고요했다.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매번 느꼈던 고요함과 또 달랐다. 우주에서 떨어졌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한테나 내 본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꺼려했다. 오죽 입 안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하루종일 입을 굳게 닫은 채 시간을 보냈을테지만 이곳은 아니였다. 과연 들어주는 이가 있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텄다.

"나 여기 있어요."

처음이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불끈 솟구쳤다.

​​

정들었던 특수유치원에 작별인사를 하고, 엄마 손에 이끌려 일반초등학교로 들어갔다. 육안으로 봐도 별 다를 게 없는 또래들과 부대끼며 자랐다. 하지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서로 다르다는 걸 나도 그 친구들도 알아챘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늘 소속감에 결핍을 느꼈다. 스스로를 우울과 악순환의 굴레로 빠뜨렸다. 심지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오랫동안 무기력에 젖은 날도 아주 많았다.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의욕을 잃은 지 오래 됐다. 그랬던 내가 아무도 없는 중환자실에 나 여기 있다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그 때의 심정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민머리에 밤톨처럼 조금씩 자라고 긴 생머리가 되고 또 단발머리로 자르고 다시 기를 때까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집단 속에서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불시에 가슴 통증이 찌릿찌릿 찾아오곤 한다. 만성이 되어서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어쩌면 이건 지난 시간들을 겪어내고 버텨왔고 비로소 한없이 약한 나를 지탱해줄 힘이 되어준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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