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새 학기 증후군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나타나는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증상을 말한다. 업무가 격년마다 바뀌는 회사 특성상 인사 시즌만 되면 여전히 새 학기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까지도 느껴졌던 초등학교 입학식을 기억한다.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패딩을 입고,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줄지어 섰다. 교단에 선 선생님의 말씀을 알아듣기가 어려워 고개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애꿎은 운동장 바닥만 신발로 콕콕 팠다. 중간중간 엄마와 동생이 잘 있는지 뒤돌아보며 확인했다. 아빠는 출근하느라 입학식에 오지 못했다. 어느새 입학식이 끝나 다 같이 교실로 이동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나처럼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달고 칠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쉽사리 알 수 없는 언어가 잔뜩 오갔다. 황급히 창가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어 입을 삐쭉거리다 책상에 엎드려 조용히 울고 말았다.
질풍 가도의 시기를 지나던 그날을 기억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장애가 부끄러웠다. 다행히 내가 입학한 중학교 두발 규정이 귀밑 10cm인 덕분에 단발로 보청기를 가릴 수 있었다. 최대한 사람들의 입 모양을 보며 알아들으려고 노력했고, 소리가 나는 곳에 모두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청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튀지 않고 싶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한 친구가 뒤에서 나를 불렀는데 내가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친구는 내가 말을 씹는다고 싸가지 없는 아이라고 오해하며 화를 냈다. 그 상황을 지켜본 다른 친구가 나에게 조용히 와 설명해 줬다. 마음이 무너졌다. 무턱대고 숨기기만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나의 장애를 만천하에 드러내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친구들이 나를 피할까? 나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할까? 나의 장애를 드러내기 싫었지만,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3교시, 4교시, 5교시….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한 채 이런저런 걱정만 쌓여갔다. 긴 고민 끝에 마지막 교시를 남기고 담임 선생님께 달려가 내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반 전체에게 알려주기를 요청했다. 선생님은 정말 괜찮겠냐고 여러 번 묻고는 종례 시간에 내게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일순간 나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힐금힐금 쳐다보던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렇게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대학교 기숙사로 가던 그날을 기억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의 대학교에 붙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엄마와 아빠는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이것저것 담았고, 정리가 끝나고도 계속 캐리어를 만지작거리며 사랑과 용기를 가득 담아 잔소리를 시작했다.
“우리 딸, 아침은 꼭 먹어야 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반찬 해놨으니까 많이 먹어. 반찬 다 떨어지면 연락하고. 생활비도 부족하면 언제든지 보내줄 테니까 알바할 생각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같은 방 쓰는 사람은 괜찮을까? 좋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나중에 햇반이랑 너구리, 귤 같은거 기숙사로 보낼 테니까 그 친구랑 나눠먹어.”
“핸드폰 너무 많이 보지마. 핸드폰 많이 보면 건강에 안 좋고 눈도 나빠지잖아. 그리고 밤 늦게 자지 말고, 일찍일찍 자.”
“우리 딸, 그래도 잘 할수 있을거야. 힘들면 언제든지 영통 걸어.”
입학 전날, 서울역으로 가는 내내 반찬이 들어있는 보냉백과 캐리어를 끌어주던 아빠와 내 손을 잡아주던 엄마. 기차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나를 계속 바라보던 엄마와 아빠. 그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기차 문이 닫힐 때까지 애써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울지 말라고 놀리며 손을 흔들었다. 기차 문이 닫히자 곧바로 좌석으로 가지 못하고 통로에서 한참이나 울었다. 알 수 없는 든든함과 동시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내가 과연 부모님의 품을 떠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새로운 환경에서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친구가 없어서 밥을 혼자 먹어야 하면 어떡하지? 하고 우려했지만, 막상 대학생활은 기차에서 흘렸던 걱정과 외로움의 눈물에 비해 짜지 않았다.
모든 외로움이 어느새 추억으로 변했을 때, 엄마와 함께 어릴 적 앨범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앨범을 보며 사진 속 엄마의 기분과 생각이 어땠는지 물어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초등학교 입학 사진을 보면서 엄마에게 내가 기억하는 것들을 말했다. 엄마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며 놀랐다.
“네가 엄마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책상에 엎드려서 우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 당장이라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아주고 싶었다니까. 그런데 네가 오롯이 이겨내야 하니까 가만히 기다렸지. 그런 너를 보면서 나도 계속 눈물만 흘렸어.”
나는 이제 엄마의 마음에 대입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낯선 곳에 놓여 당신을 찾으며 울던, 당신의 너무나도 어린 딸.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 딸이 대학교 생활을 하러 당신의 품을 떠났을 때도 그저 먹먹한 마음이었겠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냥 엄마를 안았다.
중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늘 그랬듯이 옛날 이야기를 했다. 서로가 하고 다녔던 이상한 단발 머리를 놀리며 한참이나 웃기도 하고, 우리가 언제 친해졌으며, 언제 같은 반이 된건지 기억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친구는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그때 담임쌤이 너 청각장애 있는거 막 반 아이들 다 있는데서 말하지 않았어? 와. 진짜 담임쌤 미친거 아니야? 지금 같으면 고소 각이야.”
친구는 나의 장애를 알린 담임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움과 동시에 내가 상처 받지 않았을까 걱정됐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먼저 담임 선생님께 요청한 것이라고 하니 놀라면서, 어렸음에도 그렇게 실행한 그런 용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새 학기 증후군을 여러 해 동안 겪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냥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날에, 그 외로움의 끝에는 위로가 되어주던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었다. 걱정에도 총량이 있어서, 흘러넘칠 때까지 걱정하고 나면, 더이상 새로운 걱정이 생기지 않는다. 걱정을 하면 할수록 막연한 두려움은 어느새 뚜렷한 형체를 띈다. 이제는 형체가 보이는 걱정에 대비할 힘도 만들어낼 수 있다. 내일부터 새로운 업무를 맡고, 새로운 팀원과 함께 일하게 된다. 팀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먼저 내가 농인임을 밝히고, 새로운 업무를 탐색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여전히 새 학기를 맞이하는 중학생처럼 걱정투성이지만, 결국 나는 잘 해낼 수 있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