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여름에 분연씨를 보러 가면 분연씨는 가슴을 다 내놓고 맨발로 나와 나의 가족들을 맞이한다. 윗옷을 입지 않은 분연씨를 보며 시득씨는 말한다. “제발 옷 좀 입고 나오세요.”라고. 분연씨는 아랑곳 않고 손자들을 온 힘을 다해 껴안는다. 그간 보지 못한 아쉬움을 풀듯 손자들의 얼굴과 어깨에서부터 손까지 거듭 쓰다듬는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분연씨를 보며 시득씨는 다시 옷을 입으라며 잔소리를 한다. 분연씨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방에 들어가 옷을 입고 나온다. 위는 마로 된 흰 티를, 아래는 실크로 된 붉은색 바지를.
분연씨는 여름에 덥다는 이유로 웃통을 까고 지내셨다. 나는 시득씨가 집에서 웃통을 까고 지내고 있는 것처럼 분연씨도 그러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역시 모전자전이군.' 하면서 시득씨와 분연씨를 번갈아 보며 혼자 웃곤 했다. 이제는 내가 분연씨와 시득씨를 닮았는지 여름이든 겨울이든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아래 속옷만 남기고 자연인의 상태로 지낸다. 하루는 시득씨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으면 옷 좀 입으라는 잔소리가 돌아온다. 정작 시득씨도 웃통을 벗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내로남불이야 뭐야. 이 상황을 분연씨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옷 벗고 있는 게 뭐 어때서? 니나 입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본다. 그러면 분연씨의 시선을 피하며 허공을 쳐다봤을 시득씨가 상상되어서 웃음이 난다.
분연씨는 종종 문가에 앉아 양반처럼 한쪽 다리는 접고, 한쪽 다리는 무릎을 세워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친 채 문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나는 같은 공간의 구석에서 그런 분연씨를 관찰하곤 하였다. 나는 그런 분연씨가 쓸쓸해 보여 다가 가려고 하면 담배 연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가족들의 제지에 먼 발치서 분연씨를 구경하기만 했다. 넓은 집에서 현관문을 열어놓고 언제 올지 모르는 가족들을 한없이 기다리며 홀로 담배를 피웠을 분연씨를 생각하면 코가 시큰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분연씨는 여자임에도 웃통을 까고 지내고, 적적할 때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할 말은 다 하는 상여자 중의 상여자였다. 어렸을 때 이런 분연씨의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할머니는 다 그러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고 깨달았던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친구들이 말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내가 본 분연씨와 달랐기 때문이다. 분연씨가 살아온 시대에서는 여자가 살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 혹은 쯧쯧하며 혀 차는 소리를 듣는 행위였을 텐데,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인 사람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남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분연씨가 오히려 나의 눈에는 굉장히 멋져 보였다. 분연씨가 이 세상에 아직도 살아있었다면, 지금 세대의 노브라 패션, 여자도 자유로이 흡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연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투명한 옷을 즐겨 입고 홀로 보이지 않는 투쟁을 벌였을 분연씨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