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평범 견디기

살면서 예술을 하라는 계시 따위 없었지만

by 해일

퇴고한다. 계속 고치고. 다시 쓰고. 읽고 쓴다. 그렇게 앙상해진 소설은 공모전에서 요구하는 분량에 훨씬 못 미친다.


이건 아무래도 문제야.


일주일 내내 새벽 세 시가 넘어 잠들었다. 퇴근 후 소설을 쓰겠다고 난리였다. 막 자취를 시작하게 된 시기라 더 들뜬 탓도 있다. 마감일소인을 앞둔 당일에는 30분 눈을 감고 출근했다. 아. 다래끼가 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몬스터를 먹고 돈까스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서 출력본을 꺼낸다. 프린트 카페에서 2부를 출력했다. 하나는 등기로 보낼 것, 하나는 다시 읽을 용도로. 이번에 투고한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그때 나는 역사를 빠져나왔다. 고작 이 한 문장이 한 문단을 차지했다. 나는 안다. 무엇을 쓰다가 이 문장이 나왔고, 얼마나 쓰고 지우고 고쳤는지.


뒤이어 어렵지 않은 문장들이 기다린다. 매끄럽다. 군더더기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지워 말해야 할 것도 사라진 것 같다. 종종 듣던 평이다. 개인 성향이 반영된 걸까? 나는 설명이 싫다. 그보다 더 싫은 것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거다. 한 가지 주제에 오랫동안 골몰하면 그것이 내게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구태여 설명의 필요성을 못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확실히 독자에게 불친절한 태도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수정할 생각은 않고... 문장과 문장의 사이를 읽고...


회사에서 나는 디자인과 퍼블리싱을 하고 있다. 주로 홈페이지나 쇼핑몰이다. 개발이 적용되는 페이지는 기존 템플릿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만든다. 대신 메인이나 소개 페이지류는 조금 더 디자이너다운 역량을 요구받는다.


전에는 모든 작업을 포토샵으로 진행했지만 최근에는 UI 디자인을 할 때에는 피그마를 사용하고 있다. 컴포넌트, 오토 레이아웃의 기능은 작업 속도를 향상할 뿐 아니라 협업에도 편하다. 팀장은 그래선지 디자인들이 비슷비슷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리 레퍼런스를 많이 봐도 틀에 박혀 있다고. 디자이너 출신의 실장도 덧붙였다. 다양한 레이아웃을 익히기 위해서 잡지를 많이 보라고.


사실 나는 웹디자인으로 예술성을 표출하고 싶은 부류가 아닐뿐더러 특히나 클라이언트가 명백히 있을 때에는 그에 맞춰서 디자인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하곤 했다. 이전 회사를 다닐 때 나는 1인 디자이너로 쌩신입이었지만, 전면 수정해달란 요청은 받아본 적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온전히 충족하면서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곤 했으니. 거기 내 고민은 별로 없었다. 핀터레스트와 지디웹을 돌아다니면서 조각조각, 짜집기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게 안 먹혔다. 한참 진지하게 보던 팀장이 입을 열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없어. 그는 다양한 레이아웃을 고민해 보라는 논지로 말한 거였지만 내 뇌에서 그 발언은 확장되고 왜곡됐다. 너의 디자인은 뭐 딱히 흠잡을 데는 없는데 임팩트도 없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매주 토요일, 나는 과외를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다. 9개월 정도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선생의 배려로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 잘 쓰는 애들 틈에 끼게 됐다. 그게 내 입장에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고. 수시 시즌, 원서 6장은 즉 실기 시험도 여섯 번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추가 번호도 받지 못하고 떨어졌다. 다른 두 학생은 합격해서 사라졌고, 나는 이후 계속, 수능이 끝나고도 계속, 꽁트를 썼다.


어느 날 선생은 수업이 끝난 후 내게 말했다.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시간에 맞춰 쓰는 연습을 매일 해보자. 네가 못 쓰는 건 아니거든. 흠잡을 데는 없어. 그런데 인간 극장을 보는 것 같아.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


나는 다행히 정시에서 합격했지만(하지만 그토록 갈구하던 것이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나는 자주 나를 돌아봤다. 내가 너무 기계적으로 쓰고 있었나? 내가 써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쓴 것일까, 관성적으로? 사실 나는 가난하지 않잖아. 평생 아파트에서 살았는 걸. 나는 개성이 없는 걸까? 무난한 걸까? 그래서 내 소설도 그런 거고?


나는 아주 흔한 이름을 가졌다. 부모는 평범한 게 제일 좋다는 신조로 사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평범한 게 싫었다. 그건 내가 너무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좀 남들과 다르길 바랐다. 하지만 특출 나게 두드러지는 재능은 없었다. 그렇다고 주변에서 보이는 사람들처럼 적당히 결혼해서 적당히 가족을 꾸리는... 그런 삶은 원하지 않았다. 내게 초점을 맞추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살기. 그게 내가 바라는 방향성이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고 살기엔, 나는 너무 범인(凡人)이라 눈치 따위 하나도 안 보고 나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아니다. 통념, 고정관념을 정말 싫어하는데 사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거기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내용이 뭔지도 잘 알아서 그것을 피한다.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갈고 닦는다. 텍스트, 이미지, 레이아웃...


문득 이것을 내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나는 솔직히 문학이 뭔지 모르겠다.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합평 수업에서 K 선생은 내게 너무 직접적인 것은 문학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는 좀 우회적으로 메타포를 신경 쓰며 쓰기 위해 노력하는데... 조금만 정신을 빼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쓴다.


절대 세상에 내보일 일 없다고 생각한 소설을 업로드했다. 폭력적이고, 감정에 치우치고... 작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완전 실패다. 그런데 아무 폴더에 넣어두고 잊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안의 검열을 이겨내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한 시절을 보내주고 싶었다.


너무 말하거나 너무 말을 안 하거나... 극단적인가? 중간 지점을 찾을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최근 쓴 소설의 침묵에 짓눌린 탓인지 지금은 뭐라도 가볍게 지껄이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홍콩 증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