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연기란
다시 학원에 가야겠어. 일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자취방으로 이사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결심이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호시탐탐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작년 말에도 회사 인근 학원으로 상담을 간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여러 선택지를 고민해 보다가 결국 원래 다니던 곳으로 갔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과 잘 맞고, 가격대가 적절할뿐더러 새로운 학원에 가서 완전히 낯선 환경에 나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다.
1년이란 공백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간 연습실은 편안했다. 낯익은 얼굴이 둘이나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2년 이상 연기를 배운 고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대화를 나누다가 그런 얘기를 들었다. 취미반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원 변동이 잦은 편이다, 다음 주에 보자고 인사했는데 사라진다든지, 사정이 생겨서 그만두지만 돌아온다고 말한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진짜로 돌아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연기가 그리 대중적인 취미는 아니어서 그럴까.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 수업을 듣는 이유나 목적을 묻곤 한다. 전에 나는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고자 왔다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재밌어서, 계속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일요일마다 수업을 듣는 건 한편으로 부담스러웠다. 회사 일이 바쁘거나 소설 공모전이 겹쳐 있는데 외워야 할 대사까지 있다면? 암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였다. 매번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면서 지속적으로 나의 부족함을 마주해야 했다. 못하는 스스로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성향상 이것 자체만으로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발로 돌아간 학원. 다시 시작한 지 두 달째인데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 즐겁다. 순전히 취미로 접근해서 그럴까? 그런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연기 자체에도 흥미를 느끼고 재밌다. 이 영역은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감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분석과 신체적 움직임… 신경 쓸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찰나지만 느끼는 순간이 있다. 잊기 힘든 강렬함이다. 내가 몰입을 못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내가 이해하기 용이한 상황을 예시로 들어주거나 나의 경험과 연기 상황과의 교집합을 찾는다. 그렇게 감정을 끌어내면서 계속 내게 주문한다. 더, 더 표현해. 끝까지 가봐. 나는 그런 방식의 허용을 처음 경험해 봤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되기.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기 전 항상 캐릭터 분석을 한다. 그 과정은 내게 익숙하진 않다. 소설을 쓰기 전 계획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단편이기도 했고,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서 갈등을 이루는 내용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자주 나에게 매몰되는 인간이었고, 소설은 명쾌하게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최근 쓴 경장편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다. 모든 인물이 나에게서 분열한 것 같아. 학원에서 나는 의식적으로 자아를 누른다. 나는 절대 그럴 일 없는, 한심하거나 미친 캐릭터여도, 기꺼이 그가 되어보는 경험은. 의외로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아직도 독백 연기를 하러 나가면 얼어버린다. 방에서 연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대사를 빨리 말하기 급급하다. 너무 못하는 것 같을 땐. 만약 내가 정말 잘하면 학원에 다시 가는 게 아니라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았을까? 자조하기도 하지만. 일단은 대사를 외우는 데 집중하는 걸로.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고. 상상조차 어려운 먼 미래지만. 언젠가는 연습실이 아니라 더 넓은 장소에서, 하나의 프레임에 기록되고 싶은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