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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일 Jun 20. 2024

연기, 감정, 카타르시스

진짜 느끼기  

32인치 TV에 띄어놓은 내 얼굴을 마주하는 건 항상 어색하다. 실눈을 뜨고 모니터링 하는데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좀 달랐다. 대본 숙지도 됐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표정 변화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 못한 부분에서도 지적받았다.


"다른 사람들 대사 안 듣고 내 대사만 생각하고 있지? 말하는 연기만큼 듣는 연기도 중요해."


우리는 지금 모르는 방에 감금된 상태. 탈출해야 할지 말지, 두 사람은 생사가 걸려있는 문제를 의논 중이다. 격렬한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그 배경에 반만 나와있는 내 얼굴. 눈만 껌뻑껌뻑한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슨 기분일까? 어떤 상태일 것 같아? 그럼 어떻게 앉아 있는 게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일까?"


연기에 있어서 발음과 발성은 논의할 것도 없이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내가 생각했을 때 연기를 낭독이랑 구분되게 연기답게 만드는 건 상태다. 상태는 연기하면서 유지하고 있는 감정을 말한다. 연기하기 전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만들고 들어가야 한다. 모호한 상태에선 모호한 연기만 나오기 때문이다.


인물 분석은 대체로 이렇게 진행된다. 손바닥으로 가려질 한 단락의 대사, 무슨 맥락에서 이 대사를 뱉고 있는 걸까? 이 전 상황, 전사를 상상한다. 여기 배경은 어디인 것 같나요? 누구와 얘기하는 상황일까요? 뭐 하는 인간 같아요? 그리고 이 캐릭터의 특성을 설명하는 형용사, 다양한 감정 동사를 늘어놓으며 구체화한다. 


연습할 때 SF나 사극 대본을 한 적은 없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은 일상적인 대본을 주로 받았는데 그렇다고 늘 낯익은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 셋.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다. 조용한 긴장감이 흐른다. 우리 다시 만나기로 했어. d의 말에 친구들이 놀란다. 그 쓰레기를? 절대 안 돼. 재결합한 친구를 회유하려는 내용의 대본이었다. 나는 결사 반대하는 친구 역할. 연기를 하는데 한 문장 끝날 때마다 선생님의 코치가 들어왔다. 도무지 이입이 되지 않았다. 내 일은 내 일, 네 일은 네 일. 타인의 사정에 크게 상관하지 않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주변에 그렇게 남자에 미친 인간을 본 적도 없었다. 그때 선생님이 질문했다.


"얘가 만난다는 애가 정준영이라고 상상해 봐."


단번에 인상이 써졌다. 아,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자기소개서에서도 쓰지 않을 고루한 시작 같지만, 나는 엄한 아버지와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두 분 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무뚝뚝하다. 나이 상 MZ에 속하지만 MZ 치고 체벌도 적당히 받았다. 어렸을 때 나는 큰 소리를 들으면 울었고, 회초리를 가지고 오라면 울었고, 맞으면서도 울었다. 울고 있으면 울고 있다고 혼났다. 그럼 또 울었다. 너는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다행스럽게도 부모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 밖에서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었다.


선생님은 내성적인 성격을 개선하고 자기표현을 잘하고 싶은 목적에 부합하는 대본을 준비했다. 분노, 슬픔, 억울함, 후회 등등... 일상생활에서 겉으로 크게 표현한 적 없는 감정이다. 큰 소리를 내면서 부모와 싸우는 장면도 있었다. 화도 평소 내본 사람이 잘 낸다고, 큰 소리를 내니까 하루종일 심장이 뛰었다. 단순히 부정적이라고 치부하며 없는 취급했던 감정들이 사실은 쌓여서 목울대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주 크게 연기하는 건 아닌데 꾹꾹 누른 감정이 느껴져. 언젠가 h 언니는 그런 말을 해줬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허공을 향해 쏘아붙였던 나를 상상하면 좀 부끄럽기도 했다. 평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다들 어떻게 봤으려나? 습관적으로 걱정하면서도 한 가지 확신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진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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