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외워야만 하는 연기 초심자
나는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이 참 많다. 그중에서도 암기는 학생이었을 때부터 누누이 싫었다. 단순 암기 과목은 특히나 지겨운 것. 주관식 시험을 위해 외우는 행위는 극도로 싫어했다. 발표나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 대본을 쓴 적도 거의 없었다. 쓴다고 해도 달달 외우려 노력조차 한 적 없다.
고등학생 때부터 문예창작과 입시를 준비했다. 2년 내내 백일장을 다녔지만 전부 낙방. 문학특기자 전형으로 갈 수 있는 법은 없었고 실기에만 올인해야 했다. 수시는 깔끔하게 다 떨어졌다. 공부는 진작 손을 놓은 상황. 당시 내가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은 그 실기용 꽁트, 짧은 소설을 제한된 시간 내에 잘 쓰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의 문창과 입시생은 그동안 연마한 꽁트가 있다. 이를 제시어에 맞춰 끼워 맞추는 작업을 한다. 나는 그 능력이 떨어졌다. 원고지 20장 이내의 산문을 외우지도, 어설프게 기억해내서 제시어에 맞추어 쓰는 것도. 그런데 결과부터 말하자면 당시에 합격했다. 2곳이나. 당황스러운 제시어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어울리는 꽁트를 썼다. 아, 나는 암기는 잘 못해도 순발력은 있는 거 아닐까? 이런 약간의 자만을 속에 안고 살면서. 이후 무수한 면접을 떨어지면서도 대본은 쓰고 있는다. 아직도.
그런데 연기 수업을 가기 위해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대본을 외워 가야 했다. 아주 기본이고 당연한 일인데도(대본을 힐긋거리면서 연기하는 배우를 본 적 없다!), 난감하고 힘들었다. 회사를 다니고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암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마음이 팽배한 게 더 컸다.
초반에는 대본을 외우지 않고 간 날도 많았다. 외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연기를 하려고 보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선생님이 대본을 보면서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건 나로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문자를 그대로 읽는 버릇 때문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니 연기를 덧입힐 수가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은 내게 대본을 가능한 꼭 외우고 올 것을 요구했다.
"저는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앞에 나가니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달달 외워야 해. 어쩔 수 없어. 나는 평소에 청소기 돌리면서도 중얼중얼거려. 누가 툭 치면 바로 나올 수 있게."
워낙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계속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학원을 갔던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좀 변화해보고 싶어서 찾은 거 아니었나. 점점 마인드를 바꿨다. 대본을 아무리 많이 읽고, 분석하는 것도 좋다. 그것도 준비의 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제일 기본적인 것은 역시 대본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다. 지금은 완전 햇병아리니까. 대본을 해석하고 연기에 대한 부분은 학원에서 고민하자.
그래서 잘 외우는 방법은? 정도나 요행은 없었다. 대본을 계속 쓰든 계속 읽든 녹음기에 말하고 듣든...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많은 방법들은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 그냥 통으로 외웠다. 일단 감정이니 상태, 배경 집어치우고... 건조하게. 아직 연기는 잘 모르겠고 일단 나는 앞에서 잘 말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대본을 바탕으로 연기를 하게 될 때는 총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 준비한 대로 펼치는 연기. 그다음에는 각자 생각한 것을 나누고 선생님과 함께 대본을 분석한다. 그런 후 두 번째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선생님의 코칭이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이를 숙지하고 연기를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나름대로 준비한 연기를 분출했다. 입을 벌리면서 구경하고 있다가 내 차례에 앞으로 나갔다.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뻣뻣하고 어색하게. 뭐, 잘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대본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선생님이 씨익 웃으셨다. 이제야 내게 연기의 단계가 본격적으로 주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