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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일 Jun 06. 2024

수요일 오후 3시, 젊은 예술가는 지하 카페에서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각자 개인적인 사정으로 세 번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모임. 지금은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때가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체 연기는 보통 2인이나 3인으로 진행되는데 이례적으로 4인이 함께 하는 대본을 주어졌다. 개인 연기든 단체 연기든 개인적으로 대본을 준비하고, 학원에서 맞춰보는 게 평소 하던 방식. c가 수업을 하기 전 다 같이 만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유달리 질문이 많고 열정적인 태도로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평일이지만 얼마 전 퇴사를 해서 나는 시간이 여유로운 상태였고, w와 h 언니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들 서울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 근처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10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내부에는 한 두 명 정도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한산한 편. 이미 와 있던 c는 노트에 무언가 쓰는 중이었다. 테이블 한쪽에 마이클 케인의 연기 수업을 뒤집어 놓고.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건 나름대로 궁리해서 만든 커리큘럼이었다. 그는 매주 만나는 건 어렵더라도 주기적으로 연기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했다. 서로 연기를 봐주면서 연습하는 건 산으로 갈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반영해서, 그 대신 앞으로의 방향성에 도움이 될 것 같은 피드백과 연기 및 예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 보자고.


모이게 된 네 명의 사람들. 모두 9n년생으로 한 살 터울이었다. c의 주도로 한 시간을 꽉 채워서 대화를 나눴다.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해 한 번 말해볼까요. 연기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게 예술이란? 지난주 연기에 대한 짧은 피드백과 이번에 받은 대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학원에서 수차례 만났지만 그 한 시간 동안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c는 배우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했다. w는 미술 전공자로 평소엔 개인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중, 연기 학원은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취미로 시작하게 됐다고. h 언니는 처음 만났을 땐 취미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녀 역시 배우로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당시 나는 낯가림이 맥시멈으로 치달아있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를 읽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 그냥 자연스럽게 그걸 내뱉는 사람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물 흐르듯 털어놓는 진지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들에 감회던 탓일까. 나는 불쑥 글을 쓰고 있다고 고백했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도 하지 않는 주제다. 현실적인 것들로 가득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갑자기 꿈 얘기라니.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 허무맹랑한 망상처럼 들릴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더듬더듬 말했다. 어쩌면 굳이 필요 없는 얘기까지 장황하게. (사실 정확하게 뭐라고 말했는지 어떤 반응이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처럼 밥을 먹으러 갔다.


모임이 연기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4인 단체 연기는 평소와 다르게 동선이 많았다. 당일 촬영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선생님의 예상과는 달리 그날 연기는 수월하게 진행됐다. 반면 열심히 대본을 읽으면서 전사(캐릭터가 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그 영향을 주는 이전 상황 및 배경), 캐릭터의 목적, 성격, 상태 등을 분석해 갔지만 상이한 피드백을 들으면서 연기하기도 했다. 


c는 개인 사정으로 두 달도 안 돼서 학원을 그만뒀다. w는 취업이 되어서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없었고, h 언니는 이사를 갔다. 수업에 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요즘 나는 매일 카페에 간다.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공모전에 낼 소설을 쓰고 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는 솔로도 본다. 뭐... 그런 일상이다. 학원을 안 다니니까 사람 만날 일이 없고,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예술이란 건 도대체 뭘까.


그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예술은 현실보다 더 멋지고 대단한 것 같다고... 꿈이란 걸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적 없었다. 돈을 못 벌어서 굶어 죽게 될 거라는 엄포에 두려워하면서도... 그래서 더 숭고한 것으로 여겼다, 어린 나는.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면서까지 하는 것이 예술이니까. 대신 그럴수록 예술은 어려워졌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은 알 수 없었고.


얼마 전 h 언니가 공연하는 연극에 초대받았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는 축제 때문에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객석에 앉아 극이 시작되길 기다리는데 떨렸다. 내가 무대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h 언니는 내 예상보다 분량이 많고 중요한 캐릭터였다. 평소 느끼던 그녀의 발랄하고 긍정적인 성격과도 잘 어울렸고. 그러고 보면 학원에서는 정확한 딕션, 절제하는 캐릭터를 주로 맡았는데 보완점에 중점을 둔 대본을 처방받았던 것 같다. h 언니는 완전 날아다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 힘 있는 목소리. 마이크 없이도 소극장 전체를 에너지로 가득 채웠다.


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감정이 너울댔다. 어떤 빛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었다. 운행 정지인 것도 모르고. 낮과 달리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버스킹하고 있는 밴드의 음악 소리가 들렸다. 짙은의 백야, 고등학생 때 즐겨 듣던 노래다. 그때의 나는 어른이 되면 뭐가 다를 줄 알았는데, 별반 다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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