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게 용감하게
아직 신청자가 많지 않아 일단 나를 포함하여 두 명이서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켰다. S는 중년에 이제 막 입성하는 듯 보이는 남자였다. 배워본 적은 없지만 교회에서 연극부 경험이 있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늘 연기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며 열의를 불태우는 것이 인상 깊었다. 표현하는 데 거침없는 스타일. 반면 나는 간단하게 나이와 직업을 말한 후 이 수업을 신청한 이유를 두서없이 구구절절 말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좀 개선해 보고자 왔다고, 한 마디로 충분했는데 말이다.
제일 먼저 이론 수업을 했다. 연기란 무엇이고, 발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등. 화이트보드에 적어가며 선생님의 연기론에 대해 들었는데,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직관적이고 타고난 부분이 크다고 예상한 것에 비해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영역도 많이 사용하여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을 어디선 느낀 건지 차차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스트레칭과 발성 연습에 들어갔다. 매 수업 시작할 때마다 하게 되는 루틴으로 첫 시간이니만큼 길고 자세하게. 매우 기본적이고 간단한 스트레칭인데 몸이 마음 같지 않았다. 뻣뻣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뼈에서 소리가 나고, 한 발로 균형 잡을 때마다 비틀거렸다. 연이은 재택근무로 거북이가 되어가는 몸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체 연기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카메라 앞에 서 하는 연기를 의미한다. 연영과 입시에서 극본을 토대로 하는 것과 달리 매체 연기 수업에서는 일상적인 대본을 자주 받게 된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내겐 다 초면이었다. 카메라는 주로 상체 위주로 잡게 되다 보니 손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건 좋지 못한 버릇. 초반부 수업에서는 걷기 수업도 진행됐다. 어깨 피고! 시선은 정면으로! 몸을 틀 땐 시선을 먼저 돌리고, 짝발이 되지 않게! 모델처럼 걷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게 걸을 뿐인데 급한 마음에 자꾸 어깨가 먼저 돌아갔다.
연이은 수정 하면서 선생님은 단번에 잘하는 사람은 없고, 이제 즉흥 연기를 할 거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주어진 게 없는데 갑자기요? 상황 하나만 던져줬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의 장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정중앙에 놓인 의자 하나.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카페가 아닌 낯선 연기 학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부담스럽고 그저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 안녕. 어떻게 잘 지냈어? 음, 그래. 밥 먹으러 갈까? 피상적인 대화를 뱉다가 빠르게 종료. 가만히 보고 있던 선생님이 질문했다.
"친구랑 만나면 무슨 대화해요?"
"퇴사하고 싶다, 일하기 싫다... 뭐, 그런 얘기요."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서로의 회사를 까댔다. 나는 기분파 상사와 혼자 담당하는 업무의 부담감을, 친구는 먼 통근과 사수에 대해서... 해야만 하는 일의 무거움을 나눈다고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맥주를 많이 마셨다.
선생님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다가 불쑥 제안했다.
"그럼 퇴사하는 상황을 연기해 보죠! S 씨가 말리는 상사 역할을 해주실래요?"
"네. 나이도 얼추 비슷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나와 S는 마주 보고 앉았다. 그의 안경 너머 시선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제법 뻔뻔했다.
"해일 씨는 우리 회사에서 꼭 필요한 존재예요. 그리고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해요."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요..."
S는 꼰대 상사 역할에 재능이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래도 퇴사는 안 된다고, 완고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면접 봤을 때랑 얘기가 다르잖아요. 사수가 있다고 했는데 사수도 없고. 빨리 뽑아준다고 하면서 소식도 없고. 신입한테 경력 디자이너가 하는 퀄리티와 속도를 바라는 게 말이 되는 거예요? 그 임금으로요?"
절대 뚫리지 않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해일 씨, 아까 즉흥 연기 했을 때랑 다르게 되게 자연스러웠던 거 알아요?"
나는 첫 만남에 생각보다 내밀한 고민을 너무 많이 말해버린 것 같아서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연기해 보라고 하면 다들 얼어버려요. 뭔갈 대단한 걸 해야 할 것 같다고... 착각하는 거죠. 근데 그냥 내 얘기처럼 말하면 되는 거예요. 대신 그러려면 믿어야 돼요. 아, 믿음이라는 게 종교적 차원의 얘기는 아니에요. 있죠,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처럼 보이는 거예요. 내가 믿어야 보는 사람도 믿을 수 있고요."
어느새 두 시간이 흘러가있었다. 다음 주에 하게 될 대본을 받았다. 필수는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외워오세요. 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이었다. 이거 나 본 적 없는데? A4 용지 한 장 분량을 어떻게 외우지? 어색하게 작별한 후 요상한 두근거림을 안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아직 모든 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