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없던 일상을 기억하시나요?
코끝에 칼바람이 뻘겋게 내리꽂는다. 곧 12월 성탄절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회의 외관이 작은 전구들로 곧 성탄이 오는 것을 알리듯 반짝이고 성탄 찬양도 쉽게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내 기분도 작은 전구들 마냥 반짝이며 나도 모르게 캐럴을 흥얼거렸다.
영아부에서는 11월 추수감사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12월 성탄절을 준비했다. 나는 교회에서 영아부 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성탄절에 입을 작고 귀여운 트리 모양의 옷을 부직포로 연신 만들고 있었다. 또 율동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일이면 영아부 친구들과 작은 콩자반 같은 눈망울을 보면서 앙증맞은 율동을 연습하였다.
크리스마스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영아부 율동이 아니겠는가? 물론 잘하는 1,2명을 빼고는 무대에서 멀뚱히 서있는 아이, 결국 눈물보가 터져 선생님 안고 있는 아이, 다양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냥 존재 자체로 하이라이트고 성탄절 이브의 주인공이다. 성탄절 이브 드디어 아이들의 차례가 되었고 아이들은 멀뚱히 서있는데 부모님들은 바글바글 모여 벌써부터 동영상을 찍느라 난리다. 신나는 율동곡이 나오니 부모님들이 더 긴장을 하며 아이들처럼 두 손을 모으고 오늘의 주인공을 반짝이는 눈망울로 쳐다본다.
그냥 서 있어도 이쁜 아이들인데 조그마한 몸이 즐거운 리듬에 작고 귀여운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움직인다. 정신없이 아이들과 무대를 마치고 같이 내려왔다. 아이들에게 교회에서 준비한 큰 양말 포장의 선물을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내가 꼭 산타가 된 것 마냥 전달해 주었다.
아이들도 함박웃음과 함께 엄마손을 잡고 총총이 집으로 귀가하였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곧 제주도 여행을 가는 나에게 "제주도 잘 다녀와요." 하며 인사를 건넸고 나는 "2주간 빠지고 1월 21일에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하며 약간 흥분된 어조로 19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교회 선생님들과 영아부 친구들은 1년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성탄의 설렘, 흥겨움, 기쁨, 춥지만 따뜻한 19년의 성탄절을 왠지 이제는 볼 수 없을 것 만 같아서 쓸쓸해졌다.
나는 3형제를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이다. 24시간의 3분의 2를 집에서 보낸다. 나에게 집이란 전업주부로써의 회사이고 퇴근 후 안식처고 아이들의 놀이터이다. 현재 경기도 외곽, 남양주에 있는 15년 된 아파트 1층에 살고 있다. 인천에서 거의 25년 넘게 살았는데 그곳에서 층간 소음으로 트라우마를 겪을 만큼 맘고생을 한 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 인천에서 남양주 1층으로 이사 왔을 때 자연과 정말 하나인 이 동네를 너무도 사랑하게 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을 덜컥 계약하고 말았다. 다른 것은 너무나 좋았는데 딱 하나, 체리빛 인테리어가 좀 그랬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그런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또 7년이 지나고 보니 아무래도 나는 그 체리빛 원목 인테리어가 너무나 싫어져 아파트를 내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파트를 보러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래된 화장실이 고장이 나 물이 새기 시작했다. 바닥이 새는 화장실 공사에 거의 다 되어가는 싱크대까지 그냥 새집으로 이사 가려 했는데 부동산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날 남편과 이런저런 고민 끝에 아무래도 팔리긴 힘들 테니 어차피 오래 살 텐데 대출을 받아서 제대로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론을 보았다.
정말 처음 매매가에서 3천 정도 올랐나? 하지만 그 매매가에서 안 나갔으니 7년 동안 매매가가 오르지 않은 것이다. 경기도 외곽이니 뭐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냥 맘 편히 살 수 있는 동네라서 너무나 좋았다. 인천에서는 맛볼 수 없는 휴양림의 공기, 동네 자체가 휴양림이다. 그리고 1층이라고 해도 거의 펜션 뷰를 자랑했다.
결국 인테리어를 결정하고 나니 리모델링을 하는 동안 갈 곳이 없게 된 나는 우리 가족이 어디에 있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제주살이를 해보고 싶었지만 나 혼자 3형제를 데리고 갈 용기가 도무지 나질 않았다. 3형제를 데리고 여행할 생각을 하니 걱정이면서도 중학생이 되면 잘 따라나서지 않을 거란 선배맘들의 조언에 따라 아직 초등학생, 유치원일 때 서로 좋은 추억을 만들 생각을 하니 설레고 기대가 되었다. 또한 이 때가 아님 15일간 여행을 할 명목이 없을 것 같아서 큰 결심을 하였다.
여행이란 어학사전적 의미로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여행을 갔다.
극기훈련이란 자기의 감정이나 욕심, 충동 따위를 이성적 의지로 눌러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 실시하는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이라고 한다.
더욱 더 맞다. 나는 제주도 여행 속 극기 훈련 중이다.
정말 내가 가고 싶은 장소 보다도 일단 3형제 체력이나 관심사를 우선으로 여행 동선을 짜야한다. 내가 가고 싶은 제주바다를 보며 커피 한잔을 한 시간 동안 마시며 공상할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운전기사, 요리 담당, 아이들 케어, 사진기사, 아이들 체력 안배까지 주어진 업무가 너무나 많아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여행 그리고 극기훈련이었다.
제주도는 따뜻할 때 가야 제맛이겠지만 뭐 어쩌리 인테리어 일정이 겨울 방학에 잡혔는걸... 대학 친구의 도움으로 제주 숙소를 해결하고 피난을 갈 만큼의 짐을 챙기고 15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3형제와 함께 정말 후회 없이 보내야겠다는 나의 주도적 포부는 처음에는 아이들도 나도 좋았지만 시간이 가니 점점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치 배터리가 곧 방전될듯한 핸드폰처럼 나의 체력은 방전이 되었고 절전모드의 어두운 화면 핸드폰처럼 나의 얼굴은 여행의 날이 늘수록 점점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마지막 날에는 핸드폰이 배터리가 없을 때 내는 경고음을 울리듯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마지막 일정을 강행했다. 방전했지만 아무래도 언제 오랴 싶어서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뭘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다.
하지만 사진을 보니 강행하더라도 많이 잘 다녔나 싶다. 원래 고생은 잘 잊히고 아름다운 추억만이 사진으로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지 않는가?
뭐 어쨌거나 지금 와서 보니 그 후 맘 편히 다닌 여행은 없다. 마스크를 벗은 마지막 여행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