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밥 돌 밥 돌아버리겠네

돌아서면 밥하고 돌 하서면 밥하다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

by 핑크솔트

건국이래 처음 있는 초유의 사태, 개학 연기!!


두 달이 지나 3월이 다가올수록 개학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교육부 장관은 2주에 한 번씩 나와 계속 개학을 연기하였다. 생각보다 확진자가 줄지 않고 더욱 확산세였기 때문이었다. 워킹맘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개학을 미루는 동안 일 년치 써야 할 휴가도 다 썼지만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워킹맘들은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집에 맡기고 오히려 잘 지내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쯤 돌봄 교실에서 뽑기에서 떨어지거나 맡길 조부모가 없다면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엄마들이 많았다.


그 어려운 1학년을 학원으로 돌려 막으며 드디어 2,3학년쯤 되면 아이도 크고 학교에 적응해 엄마들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계속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어렵게 일을 계속하던 엄마들에게 코로나19로 인한 계속된 개학 연기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시상태와 같은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아이를 남에게 맡길 수 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회사에 있는 연차 없는 연차 다 끌어다 쓴 상태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된 것이다.


3월의 개학은 3번이나 미루어졌고 그 기간을 견딜 수 없었던 나의 주변 워킹맘들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 주변 지인은 고통의 1학년을 견뎌 이제 좀 회사를 다닐 만해 졌는데 지금까지 허망하다며 힘들어했다. 나 역시도 첫째, 둘째가 초3, 4학년이라 재취업을 했다. 어린이집 오감놀이 외부강사였다. 10월부터 수습 3개월을 끝내고 1월부터 본격적 수업을 들어가기로 했지만 코로나19로 어린이집 외부강사는 모든 수업이 폐강하였다.


나 또한 개학이 정처 없이 미루어지니 불안해서 나가 일하는 것이 회의적이 되어 일을 찾아보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건국이래 처음 있는 개학 연기 끝에 4월 6일 온라인 개학을 맞이하였다. 정말 강제적 4차 혁명의 시작인 듯싶었다. 말 그대로 언택트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문의 3월 실종


3번의 개학 연기 끝에 학교를 가지 못하고 결국 우리는 집에서 유튜브 영상으로 온라인 개학식을 하였다. 사실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던 온라인 개학이었다. 그저 코로나니까 ' 마스크를 쓰고 개학을 하는 건가?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너무 힘들지 않으려나' 생각했다.


'정말 온라인 개학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그랬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부모들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사실 온라인으로 수업을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면 사회성이 떨어지고 나에게도 숨 쉴 틈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갑갑한 마음이 들기 했지만 그 마음보다 사실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새 학기만 되면 아이보다 더 긴장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새 학기 증후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 학년이 되어서 아이가 잘 적응할 지, 좋은 선생님을 만날 지, 반에는 못된 아이들이 있으면 어떡하나 너무 불안했다.

대부분의 엄마들 역시 그런 긴장감 때문에 학기초 담임이 정해지면, 모든 주변인들에게 수소문해 담임 선생님의 스타일을 알아보곤 했다.


사실 나도 첫 아이 1, 2학년 때는 그런 들려 오는 이야기에 엄청 귀 담아 듣곤 했다. 왠지 들어 놓으면 좋은 정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결론적으로 지금 초등학교 5학년까지 보내본 결과 정보를 알면야 좋지만 뭐 모른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자리에서 열심히 맡은 바를 할 뿐인듯하다. 이렇게 보면 내가 무척이나 유난을 떠는 엄마인 것 같지만 나는 첫째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사회성이 떨어지고 학습적으로 느리다 보니 괜히 까칠한 선생님을 만나 아이가 구박을 받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학기 초가 되면 어떤 선생님을 만날지, 친구들이랑은 잘 지낼지의 부분이 항상 스트레스로 큰 부분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3월 2일 개학과 동시에 불면증과 복통에 시달리곤 했다. 새 학기가 지나고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학부모 상담기간이 있는데 그 때가 최절정을 향했다. 1학년을 시작으로 3학년 때까지 첫째 아이의 교실에서의 모자란 점을 조목조목 이야기해주시는 선생님과의 대화는 거의 고문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나와 비슷한 고민의 엄마들은 이 시기가 되면 서로의 불안을 공유하며 울고 힘들어하며 어서 담임 상담이 끝났으면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렇게 3월 한 달은 나에게는 일 년 중 가장 힘든 달이고 기운도 빠지고 고문과 같은 담임 선생님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달이기도 하다. 그런 고문의 3월이 코로나로 없어지니 집에서 하루 종일 밥하랴 정신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공포의 3월의 개학이 지연되고 결국 4월의 온라인 개학이 강행되었다. 일 학기는 얼추 3달만 다니면 끝이 나게 되는 학사일정이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전화상담으로 상담을 진행한다는 가정 통신문이 전달되었다. 아니 학교생활도 안 하는데 무슨 담임과의 상담이 필요하랴 이번에는 정말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느린 아이를 키우기에 큰 돈을 지불하면서 아이가 어릴 때부터 발달센터에서 나의 시간, 나의 정신적 노동, 나의 육체적 노동을 갈아 넣어 아이에게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아 부었다. 발달센터를 다니며 아이가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학교를 보내면 학기초에는 돌아오는 부정적 피드팩에 너무나 허무하고 우울했다.


큰 벽이 내 가슴에 가로막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쓰나미처럼 밀려 나를 콱하고 집어삼키는 듯한 공포를 느끼고는 했다. 우리의 아이가 느려서 반 아이에게 선생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학습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 선생님들의 아이의 학습이나 느린 생활 태도의 부정적 피드팩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 저는 크게 민폐가 안 된다면 학습보다 저는 졸업에 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학습적인 것은 이 아이의 능력에 맞게 배우고 있으니 염려 마세요." 하고 선생님을 안심시키려 노력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왠지 비굴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첫째 아이가 학습을 따라가기 어려울 때마다 내가 '뿅' 하고 나타나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생각만 해오던 내가 개입 가능한 온라인 수업이라니 기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일대일로 수업할 때는 곧잘 따라오고 집중력도 높아서 학습 이해도와 습득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돌 밥 돌 밥 돌아 버릴 것 같다


온라인 개학 첫날, 선생님에게 유튜브 주소가 전송이 되었다. 아이들과 태블릿 앞에 모여 앉아 유튜브를 틀었다. 애국가도 부르고 교가도 부르고 아이들 교가를 처음 같이 앉아 들으니 기분이 새록새록하였다. '요즘 교가나 예전 나 다닐 때 교가 스타일이 비슷하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각 학년마다 선생님들이 재치 있게 나와 소개를 하셨다. 그리고 EBS 온라인 클래스로 그날그날 배울 교과내용의 동영상을 듣고 책에 필기를 하고 배움 노트에 배운 것을 요약해서 써보면 하루의 공부는 끝이었다. 수업은 12시가 되기 전에 끝이 났다.


일찍 일어나 수업 동영상을 몰아서 본 날은 11시쯤 끝이 나서 아이들은 백수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만화책을 보거나 각자 원하는 시간을 보냈다. 원래 오후가 되면 학원을 가야 하는데 코로나19로 모든 학원이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도 확진자가 본격적으로 나와 외출을 하지 않기로 했기에 모두 집에서 있기로 하였다. 아침 먹고 EBS 보고, 점심 먹고 TV 좀 보다가 아이들끼리 게임도 하고 그러다 지겨우면 문제집 풀고 저녁 먹고 아이들과 집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하고 오면 하루가 금방 갔다.


인간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
-시인 박노해-


밥은 중요하다. 특히 식욕 강한 남자아이들은 오죽하랴, 시인 박노해의 말처럼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위대한 일을 시작의 첫 삽을 내가 떠준다 생각하면 절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나는 연신 4시간 간격으로 돌아서면 밥을 차리고 돌아서면 밥을 차리는 돌밥돌밥 생활이 힘들고 갑갑했다. 아이들은 제주도 여행 이후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딱히 큰 불만이 없었다. 집에 3형제가 있어서 일까 지루해하지 않고 잘 지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한 달이 넘도록 남편 외 어른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지금은 전시 상태다. 전쟁이 났는데 여기가 대피소인 거야, 대피소가 다행히 요즘 내 스타일로 리모델링이 되었네 참 감사하다. 아이들이 저렇게 건강히 잘 있네, 참 감사하다.' 하며 일부러 감사할 거리를 찾아 나를 다독이곤 했다. 비단 나만 미칠 노릇인 건 아닌가 보다. 뉴스에서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종 우울증으로 인해 혼자 있던 노인분들이나 혼자 사는 저소득층의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종종 TV로 보도 되었다. 삼시세끼 돌밥하느랴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이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는 것도 감사하다면 매우 감사한것 일인데 왜 눈물이 나는걸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