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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사줌마 Nov 04. 2024

중년 12. 옷-얼룩얼룩 얼룩소

옷차림

“ 자기는 키도 작은데 긴 옷을 자주 입네.”

내 취향을 찾았다는 듯 알고 지낸 이가 말을 건다.

또는 여름을 뺀 어느 날에 만나

 “ 오늘은 too much! ” 아침 인사를 한다.      

 나의 옷차림은 타인의 시각에서 '라는 순수한 물질'에서 많이 어긋난다. 불협화음이 느껴질 것이다.

긴 옷으로 키가 작은 나를 덮어버리거나

입고, 입고 또 입어 옷으로 나를 누비기도 한다.    

 

옷.

 이미 제값이 있는 옷들에는 관심이 없다.

상표가 유행하는 옷은 이미 사람들에게 상푯값을 챙겼으니 내가 홍보용이 되어 싫고,

명품은 名品으로 이미 뛰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니 출중하지 못한 내가 옷을

모셔야 하니 부담스러워 싫고,

백화점 브랜드는 마네킹에게 세팅한

원, 투, 쓰리피스 중 하나일 테니 8등신의 마네킹을 따르다가 가랑이 찢어질까 봐 싫다.


 옷은 그렇게 비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상표는 기억도 잘 못하거니와 유행에 늘

뒤처지니 내 옷은 내 꼴(모양) 값이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옷들은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얼룩얼룩 얼룩소다. 옛 조선의 거리를 농부님네들과 나란히 걷던

집집마다 다른 무늬의 얼룩소들처럼 틀도 없고 규칙도 없고 태어난 채로 얻은 얼룩얼룩 얼룩무늬처럼 처음에는 이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단다.   

   

" 옷은 나의 감정 상태와 정신 상태에 따라 튀어나오는 내면의 표출이다. "  

  

 얼룩말은 천적의 시야를 혼란스럽게,

 공작은 혼미하게, 사자는 용맹하게,

하이에나는 비굴하게 인간의 추천서대로 인식되는 가죽을 가지고 산다.

그들의 옷은 한 벌로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 산다.

그러나 인간만은 수십 벌의 옷과 수십가지의 이유로 매일매일 갈아입기를 반복한다.      


 세계 역사 속 옷은 계급의 상징으로 색과 모양을 정하고 겹겹, 층층 품을 넓혀 지위를 구별했으며 법으로 지정하여 결코 넘봐서는 안 될 힘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유럽은 돈이 많은 쁘띠부르주아를 경계해야 했던 귀족들이 옷을 정하고, 루이 14세가 귀족들을 짓누르기 위해 보란 듯이 하이힐과 스타킹을 착용했다. 우리나라 또한 옷에 용무늬를 넣어 왕으로써의 위엄을 보여야 했고 파란색, 자주색, 붉은색 등으로 너와 나를 구분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계급적 용도가 가시적으로 사라진 듯 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돈의 숫자로 옷이 등급을 갖기도 하고 상표로 그 사람의 품위가 정해지기도 하는 것은 너무도 뻔한 경우라 그러려니 해지는 인식이다.

 그래서 그 선택적 상황을 개인의 아비투스라 하기에는 순수성이 좀 모자란다는 생각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 상품 안에서 자신의 아비투스를 선택적으로 골라 착용하니 결코 아비투스 자체의 순수성은 주워진 환경에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주의로 아비투스를 말하지만.)

흔히 욕망은 지위 상승이며 지위가 올라갈수록 자신을 신분과 권위에 맞추기 위해 격에 맞는 옷을 입게 된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그 사람보다는 그 직업에 어울리는 평준화된 차림으로 상징되어진다.

 ‘청담동 며느리 패션’이 딱 그 예다.

그 며느리라는 사람이 아니라 청담동 며느리들이 입는 옷이 상징되어 차림만 봐도 이미지를 떠올리니 사람과 옷이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이다. 이 순간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아비투스다.      


 허나 내면은 다르다. 무엇을 고르냐는 바로 나의 내면의 표출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차림은 시각적 정보일 뿐 선택한 그 자체를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적 아비투스를 전체의 이유로 대입하면 안 된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옷을 입고 사회의 트랙을 돈다.

 그러다 보니 욕망을 드러내는 옷을 입기도 하고 옷이 주인을 먹어치우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사회적 아비투스를 입고 사회적 취향에 함몰되어 내가 아니라 옷이 걸어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가치로 인식(브랜드, 명품 등) 하지 않는 옷차림은 자연스럽게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동물에게 주어진 한 벌이 누가 뭐라 해도 ‘난 치타다, 난 스라소니다. 난 구렁이다.’ 말하는 것처럼.     

 

 나의 옷에도 권위라던가 직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표출일 뿐이다.

뭇사람들 사이에서 틀린 그림 같기도 한.

그렇다면 길게 길게 입는 나는, 덕지덕지 입는 나는 무엇이 표출되는 것일까?

결핍이려나? 아니면 과함?

 어떤 결핍과 어떤 과다 출현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내면을 들어내는 표출이라면 그 자체가 얼룩소라 생각하며 내가 만족할 때까지 얼룩얼룩 얼룩소를 하겠다.

사회적 아비투스가 아니라 내면에 충실하겠다는 말이다.      



<배경이 된 책>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권오영 작가의 작품으로 고고학의 역할과 발굴한 유물과 유적이 증명하고 밝혀주는 우리의 역사를 튼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권오영 교수님의 희망처럼 동아시아가 동반된 폭넓은 역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중국, 베트남뿐만 아니라 티르키에까지 우리와의 역사가 이어져있음을 잊지 말고 적극적으로 아시아 유물발굴에 참여하고 나아가 세계 속 한반도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관점이 확장은 나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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