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평범한 어느 저녁, 매콤한 중국식 탄탄면을 H와 함께 먹고 있다. 탄탄멘을 먹는 우리 테이블의 공기가 약간 무겁다. 내가 꺼내선 안 되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앞으로의 나의 곁에 H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점점 커지는데, 내가 H에게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현실이다. 내가 H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나는 모든 방향에서 H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여러 번 언급했겠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가치이기 때문이고 핵심인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나의 삶의 이유, 존재 이유가 된다. H는 나의 최우선순위에 있는 인물이다.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나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내가 H에게 얼마나 더 잘해줄 수 있을지, 정녕 그것이 H에게 와닿는지,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알고 싶었다. 물질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말이다.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 H가 원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내가 그 기준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스시로 예를 들자면, 동네 스시집에서 1만 원짜리 가성비 판초밥을 먹었을 때와 최고급 스시 오마카세를 먹을 때의 만족감은 다르다. 어떤 부분에 높은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가성비 판초밥이 만족스러울 수도, 스시 오마카세가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만족감만 바라보며 선택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가성비 판초밥을 매일 먹는 것은 가능하지만 스시 오마카세를 매일 먹을 순 없다. 마음만은 H에게 매일 비싸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다. 더 좋은 음식을 주지 못해서, 그래서 항상 미안하다.
혼자 먹을 때의 나는 가성비 판초밥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적당한 가격에, 합리적으로 소비를 하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H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기에 매번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좋은 음식, 좋은 물건, 좋은 선물에 시간과 에너지, 각종 재화를 들여도 아깝지가 않다. H와 함께 있을 때면 내가 혼자 먹을 때와는 다른 선택을 자주 하게 된다. 이러한 대접하는 마음은 음식뿐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적용되어 나 스스로를 기쁘게 한다. 하지만 최근 H와 함께 식비를 아껴나가기로 결정을 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H도 좋은 음식과 좋은 물건만을 원할까?'
어떤 관계가 길게 지속되려면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상대가 원하는 수준과 일치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재화들을 본인의 경제적 능력으로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여러 사회적 파이프라인을 본인의 능력으로 구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셋 다 쉬운 얘기는 아니다.
직감적으로 느껴왔던 것은, H는 그 기준이 꽤 높다는 것이다. H에게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 기준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얘기를 할 때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의 나는 회피하듯 있는 힘껏 대화 주제에서 달아났다.
하지만 오래 함께할, 미래를 약속할 관계가 되려면 불편하더라도 판도라의 모든 방을 열어 나가야 한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있던 어떤 마지막의 방까지 모두 열고 내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오픈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 서로의 취약점과 아픈 상처까지도 모두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취약한 점과 상처까지 모두 드러냈을 때에도 여전히 상대가 나를 좋아해 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는 단계가 아닌 것이다. 나에게 취약점은 경제적, 현실적인 조건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산재해 있다. 이러한 취약점을 가감 없이 H에게 드러내도 괜찮겠다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 이러한 취약점들이 서로에게 단점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서로 상호보완해 나갈 수 있는 장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탄탄멘을 모두 먹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H와 어느 정도의 서로의 가치관과 현실적 이야기를 나누었다. H는 내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연애 초반에 들었던 사소한 정보들이 나의 생각 안에서 많은 파장을 만들어냈고, 그 파장들이 쌓여 오해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모습보다 H가 훨씬 더 성숙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경제관념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중요한 이야기지만 차차 해나가면 된다. 데이트 비용을 서로 아껴나가기로 결정하는 것에서 우리가 중장기적인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이미 서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의 지출을 아끼고 걱정해 주는 H의 모습은 사랑스러움을 넘어 든든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은 당장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이뤄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씩 모아나가면서 눈과 귀를 열고 때를 기다리다 보면, 목표와 꿈을 이룰 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H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나는 H에게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의 취약점들이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공존한다. 만약 처음 시작할 때로 되돌아가, H의 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H를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그녀가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나는 떠날 수밖에 없다. 많이 아프겠지만 그래야만 한다. 혼자서라도 차근차근 쌓아나가며 목표를 이뤄나가야 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H가 있든 없든, 내 할 일은 계속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이겨내기 힘들어 나의 밑바닥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함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챙겨준다는 일은 스스로 홀로 선 후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이 길의 끝에 H가 함께할 수 있길 마음을 다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