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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이런 날이 많진 않지만, 몸이 피곤했는지 오전부터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H와 함께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원래는 H의 동네 카페에서 작업을 한다. 일요일은 매주 거의 그렇다. 당연하게도 이번 주에도 H의 동네로 갈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달랐다. 몸도 약간 나른하고, 점심을 먹으니까 누워서 잠시 쉬고 싶어 졌다. 그래서 H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깐 누워서 쉬기로 했다.
누워서 전화를 걸었다. 10분만 누워있다가 가도 되냐고 물었다. H는 그러라고 했다. 몸이 나른하고 으슬으슬해서 뭔가 낮잠을 자고 싶다고 했더니, H는 그러라고 했다. 오늘은 그냥 잠시 쉴까 했더니, H가 우리 동네에 오겠다고 했다. 매번 H의 동네 근처에서 보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하니까 감동이었다. H도 나를 소중히 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매번 H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만 심지어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자고 한다.
H가 우리 동네로 오자마자 우리는 가보기로 했던 공원을 산책한다. 겨울의 햇살은 낮게 깔리고, 오후의 따스함이 묻어 나온다. 하늘은 파랗고 맑은데 늦은 오후에 달이 하얗게 떠있다.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공원인데도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진다니. 공원 바로 옆에는 우리가 가기로 했던 Chillin 카페가 있다. 아주 작은 코너형 건물에 있는 아주 작은 카페다. 천장도 낮고, 테이블도 몇 개 없지만 아주 따스하고 잔잔한 그런 동네 카페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 중에 공원을 산책하는 노부부의 사진이 있다. 언젠가 저렇게 잔잔하고 따스하게 늙어갈 수 있으려나.
H와 함께 음료와 피낭시에 하나를 시켜서 나눠먹는다. H의 초코라떼에는 마시멜로를 추가했는데 아주 맛있었다. 이 맛있는 마시멜로를 맛볼 수 있도록 H가 양보해 주었다. 나는 H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을 보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도 얼음을 넣어주었고. 각자 상대방이 주문한 음료를 더 많이 마셨다.ㅋㅋ 나는 앱 개발을 하려고 노트북을 켰고, H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렸다. 각자가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해서 작은 성과들을 내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곤 우리는 삼계탕을 먹었다. 사실 나는 무엇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 H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나도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삼계탕이 먹고 싶었다. 몸이 나른해서 보양식이 먹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사실은 내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어서 추억이 남을만한 음식을 고르고 싶었다. 삼계탕은 H와의 순간들에서 항상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도 좋은 추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삼계탕을 고른 것이다. 심지어 H는 멀리까지 와서 내가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주고 먼 길을 돌아갔다. 내가 매번 오가던 길들이라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H도 나에게 이런 마음이었을까.
H덕분에 따스하고 여유로운 하루, 카페의 이름처럼 chill 한 하루를 보냈다. 무주상보시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깊은 마음속에는 관심받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H가 나에게 주는 관심들이 좋았고, 앞으로도 이런 행운이 가끔은 찾아오길 바란다. 많은 걸 바라진 않더라도 가끔 이렇게 여유롭고 소소하게 보내는 하루 정도는 바래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