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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이 축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지금 그렇다. H에게 푹 빠져있다. 그 마음으로 H 곁에 머문 지 벌써 1년 9개월이 지났다. 오랜 시간 같이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내가 주었던 사랑만큼 기대가 커져간다. 내가 H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H의 사랑은 메아리 같은 것이다. 내가 간절히 바라고 온 마음을 다해 외치면, 언젠가 한 번쯤 돌아올 메아리. 바쁠 때도, 바쁘지 않을 때도 온 마음을 다해 외친다. H는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실제로 H는 정말 사랑스럽다. 그 어떤 얼굴이나 몸매가 예쁜 여자도, 이렇게까지 나를 간절히 원하도록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간절히 H의 사랑을 원하는 만큼, 그만큼 너무 아프다. H가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메아리처럼 아주 가끔, 아주 조금. 돌아올 뿐이다. 나도 고단했던 하루를 위로받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 나에게 H는 그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나에게 H는 너무 어렵다. 1년 9개월이 지났지만, H는 아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어려워하는지 잘 모를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훈련되었다. 공감능력이 너무나 뛰어난 H는 불행하게도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러한 H를 배려하기 위해 언젠가부터 슬픈 감정과 힘들다는 표현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괜찮았다. 그리고 지금도 아무래도 괜찮다. H를 원하는 마음이 커서, 내가 원하는 다른 것들은 없어져 버렸다. H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전부 해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H의 곁에 있더라도 여전히 짝사랑이다. 어떤 커플이든 한쪽이 더 좋아하는 마음이라지만.
H는 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한) 사랑이 느껴지진 않는다. 필요로 하기에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나는 매번 H가 부리는 사랑스러운 애교에 녹아버린다. 그 애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다른 어떤 누구도 이렇게까지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애교를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H는 본인이 어렵거나 힘들 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나를 찾는다. 그런 순간에 H에게 나는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 된다. 그 순간 나의 마음엔 엔돌핀이 샘솟는다. H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어쩌면 착각일지도. 인격적으로, 능력적으로 얻어야 하는 인정을 일시적인 순간에서 찾고 있다.
나도 안다. 인정받으려는 마음도 내 욕심이라는 것을. H의 곁에 오래 머물기엔 내가 가진 능력과 돈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을. 내가 가진 현재의 능력과 과거의 노력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고, 오롯이 인정해 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욕심 때문에 H를 놓을 수가 없다. 앞으로 H만큼 순수하고 주변 사람과 물건, 일상을 소중히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다. H는 주변의 모든 사물과 모든 동물, 모든 식물과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하고, 모든 움직이는 것에 공감한다. 이런 사람은 H 말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픔을 참으면서, 그저 곁에 머물 수 있음에 만족해야 하나.
아니면 H의 곁에 머무르지 못하는 아픔을 견뎌야 하나.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은 축복이 아니다.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