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2
"어떻게 하면 h를 잊어 낼 수 있을까. 요즘 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
침묵 끝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해가 저물기 전 애향공원의 햇살이 오늘의 마지막을 남기고 떠나듯, 아낌없이 따스하게 감싼다.
"갑자기..? 왜 잊으려고 해. 그건 잊을 수 없는 거야."
"그냥..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우리가 평생 이렇게 만날 순 없겠지. "
"우리가 80살이 되어서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h가 결혼은 안된다고 했잖아. 근데 왜 결혼은 안된다고 했더라... 여튼.. h는 내가 좋아?"
"그럼 좋지. 나의 가장 편한 친구야."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해 말을 멈춘다. 생각이 조금 많아진다. 역시 h와의 이 관계는 조금 독특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런 사랑과는 다르다.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영혼만' 연결되어 있는 느낌. 서로 집착하고 원망하고 서로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런 연애와는 다르다.
"우리는 너무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
"그걸 느슨하게 해야 해.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팅' 하고 튕기는 거야. 끊으려고 하면 안 돼. 받아들여야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감수성 어린 작은 소녀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작년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 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사랑하는, 이 작은 심장을 가진 소녀를.
"우리가 함께 있던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는 거야. 3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일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가 이곳으로 이동해도 서울에 집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이 시간도 여전히 여기에 존재하는 거야. 나는 그걸 알고 있어."
"그래.. 모르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기억하진 못해도 남아 있는 거야. 마치 대상포진처럼. 나중에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지. "
"웨상포진이네. ㅎㅎ"
"웨상포진 뭔가 맘에 안 들어. 이상해..ㅋㅋ 여튼 없어지지 않고 이 기억이 숨어있다가 나중에 치매 걸려서 다른 거 기억 못 하고 나만 기억할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고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순간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h가 말한 것처럼 '지금'은 4차원의 세계에서 항상 존재한다.
소나무 잎들이 하늘에 걸린 것처럼, 흘러가듯 떠나는 구름처럼. 듬성듬성 예쁘게 모여있다. h 덕분에 이런 감성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h를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근처에서 파스타를 먹기 위해 이동해야 한다. 가볍게 밥을 먹고 서울로 발걸음을 혼자 옮겨야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봤어?"
"아니.. 그거 넷플릭스에서 하는 거였나?"
"나 좋아하는 거 맞아? 그거 봐봐.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거야."
파스타를 주문한 우리는 식당에 마주 보며 앉아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슬픈 발라드의 피아노 선율이 식당 안에 흐른다. h의 눈 아래에 맑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고이기 시작한다. 나도 순간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지금 이 순간이 h를 보는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조금씩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울적해진다. h 때문에 슬프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노래가 슬프네.."
그 말에 h가 배시시 웃는다.
"진짜 웃겨. 감성적이야."
그 말에 나도 살짝 웃음 짓는다. 하지만 다음 h의 말이 가장 위기였다.
"그래도 건강은 잘 챙겨야 해."
…
우리의 이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해 금방 잊어버린다. h를 만나기 이전의 나를 전부 잊어버렸듯, 앞으로의 내가 '지금'의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어떤 4차원에 존재하는 지금의 우리를 누군가가 기억해 줄 수 있도록 말이다.
격렬하고 뜨겁진 않았지만, 이렇게 작고 바스락거리는 사랑도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