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만에 연락되다
1980년 8월 29일 나는 목포 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곳 유치장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주인구이다. 그곳에서 센디라는 목포 폭력배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구 씨는 그곳에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얼굴도 미남이고 말도 잘했다. 그를 45년 만에 연락이 되어 오늘 통화하게 되었다. 오늘 목포 518 호남지회 사무실에 탄원서를 쓰라고 해서 같더니 박성용 씨가 이야기해서 알게 되었다. 박성용 씨는 광주에서 총에 맞았던 사람이다. 박철옥목사도 총에 맞았고 박병선 씨도 총을 손에 맞아 손을 잘 쓰지 못한다. 그 당시 처참한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다.
주인구 씨는 그동안의 삶을 이야기한다. 오늘 처음 듣는 말이다. 목포 518에 총기를 수거했는데 다시 그 총기를 나누어 주었다. 목포경찰서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아 몸이 안 좋다. 목포경찰서 2층에서 고문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내 아들 고문하지 말라고 천만 원을 형사에게 주었다. 그는 상무대에 인계가 되었는데 몸이 안 좋아서 누워있었더니 여기가 어디인데 누워있냐고 군인이 발로 걷어찼다. 경찰이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니 이곳이 시체 치우는 곳이냐고 말한다. 그다음 날 어머니에게 연락해서 택시로 왔다. 그는 재판도 받지 않고 오게 되었다.
나는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지 않았는데 교회 권사님 남편이 거기 형사여서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이혼하고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한다. 지금은 포천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다. 그가 정신보상과 8차 보상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정신보상과 8차 보상은 시효가 지나서 신청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특별법이 생기거나 9차 보상이 있으면 가능할 것 같다. 그의 어머니가 최금순 씨로 목포산정교회 권사님이다.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유산이 많아 갑부였는데 아들의 소식을 듣고 술을 많이 먹고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45년 전 목포 경찰서 유치장에서 같이 지냈는데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준 것을 감사한다. 나는 그곳에서 일주일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59일 있으면서 여러 번 고문을 받고 죽어도 묻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목포에서 술집을 크게 하다 망했고 노태우정권 때 범죄와의 전쟁 때 폭력배로 잡혀 들어갔다. 그는 건강하고 멋있고 말도 잘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의 사진을 보니 전에 얼굴모습이 그대로 보이지만 고생한 흔적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