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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g Lee Jan 02. 2022

이력서 양식에서부터 차별의 냄새가 난다

고작 서류 1차에 이 정도 정보까지 요구한다고?

*시작에 앞서, 이 글에는 불가피하게 '라떼는-' 하는 전래동화 같은 스토리가 포함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0년 전에 대학을 막 졸업하고(2012년) 이력서를 쓸 때는 이력서 양식에 정말 별게 다 있었다.


사진은 당연히 필수였고 키와 몸무게 심지어 혈액형까지 요구하는 이력서 양식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혈액형은 대체 왜 쓰라고 한 거지? 혈액형 성격론을 믿어서? 유사시에 나를 피주머니로(매드맥스)쓰려는 건가?? 싶은 의문이 남는다. 종교도 대부분 적는 란이 있었는데, 그나마 이건 ‘나’에 대한 정보들 이기라도 하지. (높은 확률로 직무와는 전혀 관계 없지만)


이럭서에 가족사항을 적고(가족 구성원이 몇인지 부/모/형제 1/자매 1 이런 식으로), 가족의 이름과 주민번호도 적어야 하고, 가족의 직책과 직장을 적으라고 요구하는 회사들도 많았다. 

아니 내 개인정보도 아니고 가족들의 개인정보까지 몽땅 팔아치워야 겨우 회사에 '지원'이 가능한 시절이 고작 10년 전의 일이다. 이건 내 추측으로는 군사독재 그 시절부터(빨갱이 잡는다고)이어져 온 게 아닌가 싶은데, 지금은 저희 엄마는 판사 출신 국회의원이에요! 하면 부정입시로 난리가 나는 걸 보면 참 빨리 많이 바뀌었네 싶기도 하다. 아, '본적'을 적는 란도 있어서 나는 내 본적을 이 때 알게됐다.출신 지역, 심지어 집안의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을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라고 봐야하나…


면접에서도 별다르지 않았다. 남자친구 유무라던가 결혼계획, 출산계획 같은 것도 흔하고, 면전에 대고 하는 외모 평가도 빈번하게 있었다.

결국 여러 번의 굴욕적인 이력서 쓰기와 면접을 거친 후에 나는 한국 회사 취업을 포기했다.


이후 나는 서류접수부터 부당하게 과한 정보를 요구하는 회사들을 거르고, 면접에서는 구직자를 을로 보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회사들을 걸러나갔다. 그리고 그러면 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2014년부터 외국계 회사에만 이력서를 넣고, 결국 성공해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다가 독일로 유학 다녀오고 또 외국계 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니까, 2013년 이후로 나는 한국 기업에 지원서를 넣어본 적도, 한국 기업에서 일해본 적도 없다.


독일에 유학가서 젠더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채용에 대해 배우면서 나는 특정 직종에서 마땅히 직무를 위해 갖춰야만 하는 신체조건이 있지 않은 이상 불필요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피부색에 따른 편견과 차별을 야기할 수 있어 지양해야 하고, 출신 국가나 지역도  종교적 문화적 차별을 막기 위해 이력서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인사담당자가 된다면 이런 부분을 각별히 신경 써야 하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고 배웠단말이다. 성별, 나이, 결혼 유무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이력서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내용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갑자기 한국에서 구직을 해야겠다! 하고 영문이력서를 작성하고 Linkedin에서 내게 맞는 직무의 구인공고를 찾아 지원을 하려고 보니 이게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직무가 맞으면 지역이 너무 멀고, 지역이 가까우면 내 경력으로는 모자라고,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외국계 회사 한정으로 구하려고 하니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얼마전 일한 곳도 사실 외국계 회사이긴 해도 90% 이상 한국인 직원인 회사였는데도 아주 자유롭고 수평적 분위기였었지(30대의 내가 인턴으로 뽑힌 것만 봐도). 뉴스나 기사를 보다 보면 우리나라도 요즘 차별이나 특혜, 그리고 개인정보에 대한 의식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았고.


무엇보다 2020년에 한국에서 외국계 회사 채용팀에서 일하며 학벌이나 나이, 외모나 성별은 전혀 따지지 않고 경력과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는 모습을 본 나는 “와 한국 많이 바뀌었네!” 했던 것인데, 막상 다시 구직자가 되어보니 그냥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하려고 운을 다 끌어다 쓴 것 같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일단 10년 전에도 존재하던 '사람인'이라는 플랫폼에 이력서를 써서 올려봤다. 곧 한 채용대행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국문 이력서를 달라기에 혹시 이력서 양식이 있냐고 물었더니 곧장 메일로 기가 막힌 양식을 보내줬다.



자, 그럼 여기서 퀴즈! 이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에서 부적절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1. 사진 必

2. 결혼 여부

3. 생년월일

4. 성장과정

5. 성격의 장, 단점

6. 디자인... 이 너무 올드하지 않나.


사실 5는 뭐, 물어볼 수도 있고, 6... 은 용서 못할 정도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1-4는 좀  많이 아니지 않나? 얼굴 보고 뽑을 거니 사진이 필수이고, 내 생년월일은 입사 시에나 필요한 개인정보지만 나이로 걸러야하니 필요한 정보고, 구직자의 성장과정을 통해서는 뭘 할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가난하거나 편부모 가정이거나, 다문화 가정 출신자면 안 뽑기라도 하게? 조부모님 손에 키워져서 트렌드를 못 쫓아갈 것 같다거나 그런 걸로 사람을 평가하나? 성장과정은 친한 사이에도 모를 수 있는 개인사인데 그런 걸 내 소개로 서류화해서 면접도 볼 지 안 볼지 모르는 회사에 제출하라고???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었다. 나도 모르는 새 10년 전 과거로 돌아왔다거나 그런가? 지금이 2012년이고 저 사람들은 실수로 키와 몸무게, 가족관계 기입란을 빼먹은 이력서 양식을 보내온 거고??


잠시 멍때리고 있다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일단 현실임을 직시했다. 그리고 최대한 정신을 부여잡고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이력서 탬플릿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탬플릿이 채용대행사가 원하는 양식인지, 지원할 회사에서 원하는 양식인지에 따라 지원할 것 같습니다. 업무와 관계없는 사진이 필수인 점과 성장과정 등의 개인정보 요구는 좀 과한 것 같아서요. 이 정도로 구시대적 마인드 가진 회사에서는 일하기 힘들겠습니다.

추천과 이력서 양식은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는 한국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구직에 실패한 것일까? 역시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 하나? 하고 반나절 정도를 보내고서, 현재 한국 대기업에서 10년 차 채용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 구직해보려고 하는데 이상한 이력서를 받았다고.


IT 대기업의 채용담당자인 친구는 "이건 좀 너무하네, 이 회사가 특히 올드한 거야... 요즘 이 정도는 아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럼 대체 요즘 국문 이력서 트렌드는 어떤 것이며, 연봉 트렌드는 어느 정도냐고 물어봤고, 가능하면 경력기술서나 이력서 템플릿을 좀 보여줄 수 있겠냐고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흔쾌히 자신의 경력기술서를 보내줬다. 다행히 친구가 보내준 경력기술서에는 사진도 없고, 결혼 유무도 성장과정도 없이 지난 10년간의 경력과 실무능력, 실제 수행했던 역할과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친구는 이력서를 쓸 플랫폼으로 Wanted.co.kr을 추천했고, 여기서 이력서를 쓰고 마음에 드는 회사와 직무를 찾아 지원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외국계 회사가 목표면 피플앤잡에 이력서 올려놓고 기다리면 헤드헌터들에게 연락이 올 거라는 말도 덧붙여서.


채용대행사의 이력서를 통해 한국 구직시장의 매운맛을 본 나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친구가 알려준 방법대로 국문 이력서를 쓰고 여기저기 지원을 해봤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지원 이틀 만에 면접 세 개가 잡혔다. 쓸데없는 개인정보나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것 없이 내 경력과 직무/능력만 기술한 이력서로 1차 서류합격은 세 군데나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변하지 않았지만,

또 누군가는 변하고 있었구나 싶은 순간.


아직은 포기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며 오늘도 채용공고를 읽고, 지원자격을 정독해본다. 30대라서 알바도 못 구한 내가 실제로 신입에 가까운 경력에 어딘가에 채용되는 일이 가능한가 싶어도 뭐 당장은 조금 신나 하며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다. 과연 나의 다음주와 다음달은 어떨 것인가…!


일주일 후 서류 합격한 곳의 면접을 봤는데 결과는 과연?

잘나가는 AI 스타트업 지원  면접 후기 ​


알바 구하기에 도전해 본 30대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다른 글을 추천합니다.


삼십 대는 알바하기엔 너무 노쇠한건가?

 https://brunch.co.kr/@e7102229b99c48a/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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