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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g Lee Oct 15. 2021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손녀보다 손자가 우선이던 옛사람, 그럼에도 할머니를 더없이 사랑했던 이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 상주 란에 딸, 사위, 손자까지 열여섯이나 되지만 맏이여도 여자인 나는 그 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서, 친한 친구들에게도 부고를 돌리기가 망설여져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렇게라도 소식을 전하고 할머니를 추모해보려고 합니다. 상주는 못되지만 나는 정말 우리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병상에 누워계신지 오래라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드라마에서 보듯이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뛰어가서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 정도는 볼 기회가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 같은 건 받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많은 자식 손주들을 두고 홀로 눈을 감으셨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 된다고 해 한 번 찾아가 보지도 못했는데. 재작년에 뵌 것이 할머니와 나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코로나만 나아지면 곧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할머니는 코로나 이후로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다가 가셨을까. 그 생각을 하면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난다. 백세도 넘게 사셨으니까 호상이라고,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 마지막이 이런 식이 된 것이 못내 속이 상한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그런데도 막상 할머니와 둘이 찍은 사진을 찾아보려니까 그건 또 많지가 않더라. 할머니가 나온 사진은 종종 있는데도, 왜 할머니와 둘이서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은 이렇게나 적을까. 할머니랑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 까지 같이 살았으니까 9년이나 같이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들한테 굳이 소개하려면 내 할머니는 외할머니다. 하지만 나는 친할머니는 아버지 결혼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라고는 우리 할머니뿐이어서 외할머니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할머니는 1910년대에 태어나셔서 자식 여덟을 두었고, 엄마는 할머니의 일곱째, 2남 6녀 중 막내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것엔 유산을 나눠가지라는 할머니 말씀에 앙심을 품은 장남이 할머니 및 다른 가족과 연을 끊는 결정을 해서였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평생을 아들이 최고라고 믿고 살던 분이셨다.


 일제강점기도 겪고, 6.25도 겪어내고 살아온 우리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 맞다. 그래도 집안의 제사는 남자가 모실 거니까 장남과 장손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외손주인 우리들이야 어차피 제사야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무의식적으로 손자가 손녀보다는 조금 우선인 사람이었다. 내가 아직 밥을 다 못 먹었어도 남동생이 밥을 다 먹었으면 나한테 동생 물을 떠다 주라고 했고, 잡다한 집안일 등은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한테만 시켰다. 그건 아주 오래 어떤 의심도 없이 몸에 밴 주술 같은 것이어서 엄마가 그런 걸 만류해도 할머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남동생과 둘이 밖에 나가기라도 하면 나는 당연히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애가 다치기라도 하는 날엔 누나가 되어서 뭘 하느라 애가 다치게 하냐고 혼이 나기 일쑤였다. 그 애의 과한 장난에 내가 다치고 울어도, 남자애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누나인 내가 이해하라고 했는데 나는 그게 억울하고 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날들이 많기도 했다.

나와 내 사랑하는 할머니

그런데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 애보다 나를 덜 사랑한다고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라, 할머니의 세상에서 누나는 당연히 부모가 없으면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고, 여자아이들은 남자보다는 많이 참고 집안일도 잘 도와야 했을 거다. 할머니가 나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할머니와 나는 함께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서 완벽히 겹쳐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에 부족함이 있다고 보기엔 또 나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할머니 등에 업혀서 같이 숫자공부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벽에 붙인 큰 숫자들과 한글 자음 모음을 할머니가 열심히 읽어주었던 기억.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할머니도 그때 한글을 배우셨다고 했다. 노인대학에 다니면서.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70대에 접어들었을 할머니는 손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어서 한글을 열심히 배우셨었고, 내가 조금 더 커서는 함께 앉아 책을 읽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항상 내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분이었고, 아마도 내게 제일 많은 칭찬을 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서도 할머니일 것이다. 내가 넘어져도 잘 울지 않는다는 것도 할머니에게는 자랑이었고, 입이 짧은 것도 할머니에겐 어린애 답지 않게 식탐도 없이 어른스럽다며 자랑거리가 되었다. 내가 아플 때는 몇 시간이고 거칠지만 따듯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시고, 내가 좋아한다고 매년 유자를 한 박스 씩 사다가 유자청을 담아 주셨는데, 우리 집에서 유자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나 하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나를 아주 특별히 여기고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치매로 요양원에 계실 때도, 분명 아무도 못 알아보신다고 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늘 나를 알아보셨다. 우리 보람이 왔구나.. 하고 아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지나가는 간병인을 불러 세워서 “얘가 우리 손녀예요, 우리 손녀가 이렇게 고와요” 하고 자랑을 하셨었다. “할머니께서 몇 달을 아무도 못 알아보시고 말씀도 없으셨는데, 예쁜 손녀분 오시니까 정신이 돌아오셨네요” 하는 간병인의 말에 요양원을 나오면서도 앞이 안 보이게 눈물이 쏟아졌었다. 그게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동생이랑 싸우지 말고, 작은엄마한테 잘하라고 당부하던 할머니. 할머니 나 결혼하는 것도 봐야지 했더니 너는 너 알아서 잘할 거라고, 할머니 없어도 야무지게 잘할 거라고 해 준 할머니.


연락을 받고도 한참 울었는데, 막상 장례식장에 가니까 또 그제야 실감이 나서 또 눈물이 났다. 거기서 한참을 울다가 나왔는데, 집에 오니까 자기 전에 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제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생전에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피자를 시켜먹었다. 나보다는 할머니가 좋아하실 맛으로 시켜서 먹으면서, “우리 할머니는 피자 좋아한다~” 하고 친구들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던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가끔 할머니 댁에 피자를 사 들고 가던 대학시절도 생각났다. 돈 아깝다고 장 보러 가면 맨날 푸성귀에 잘해야 고등어 한 토막을 사던 할머니는 외식을 아까워했지만, 그래도 막상 외식을 하면 누구보다 맛있게 잘 드시는 게 또 할머니셨는데.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던 피자를 가끔은 먹고 싶다고 조르고 졸라서 사 먹고는 했었는데.


 앞으로 할머니 기일에는 피자를 사 들고 할머니가 생각나는 장소들을 찾아가 볼까 싶다. 나를 곱다고 해 주던 유일한 사람, 누구보다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할머니. 이제는 보고 싶어 하시던 엄마랑 같이 계실 거라고 믿는다. 막내딸이랑 밀린 회포라도 풀고 계시면 언젠가는 나랑도 다시 만나겠지. 고마웠어요 할머니, 사랑하는 정기순 여사,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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