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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g Lee Oct 22. 2021

아, 우울증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매일이 우울해야만 우울증이 아니에요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나는 우울증 환자이다. 


이런 진단을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나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균 수치와 우울증 환자들의 평균 수치, 그리고 나의 수치들을 그래프를 통해 비교하며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나는 객관적으로 우울증 환자이다.


그런데 내가 매일매일 아주 우울한 기분을 느끼고 사냐고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내 우울증이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딱히 우울할 이유도 없고 실제로 아주 우울한 상태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번에 병원에 가서 또 검사를 받아보고 상담을 받아본 이유는 나의 무기력과 집중력, 기억력 저하, 그리고 끊임없는 통증들 때문이었다.


나는 이유를 찾아서 헤매었다.

건강검진도 받아보고, 간수치도 갑상선 호르몬 수치도 정상임을 확인했다.

운동을 너무 안 해서 체력이 떨어진 탓인가 싶어 헬스장도 다녀봤고, 햇빛을 많이 안 봐서 그런가 싶어 일부러 밖에 나가서 햇빛도 맞아봤다.

각종 영양제와 비타민도 챙겨 먹어보고 좋다는 건 정말 다 한 것 같은데 나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다리 통증은 아파서 두드리다 보니 퍼렇게 멍이 드는 지경까지 갔고, 엑스레이도 찍고 충격파 치료와 도수치료도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매일 밤 평균 두, 세 번은 자다 깨고 악몽을 꾸는 것도 내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인후염 혹은 편도염으로 목이 붓고 열이 나서 단골 이비인후과가 생겼고, 면역력이 저하되면 생긴다는 편평사마귀가 온몸에 빼곡히 번져갔다. 잊을만하면 여기저기 생기는 수포나 발진도 역시 면역력 저하 외에 다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아, 쓰다 보니 이런 상태에서 우울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우울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냥 뭐랄까,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픈 건 성가시고, 몸은 매일이 무겁고 피로감이 하루 종일 따라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랜 집중력을 요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조금쯤 답답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정도이지 울적하고 슬퍼서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우울증 환자들의 상태)는 분명 아니었다.


코로나 시국인만큼 만나기 힘든 친구들을 어쩌다 만나면 반갑고 좋았고,

어딘가 교외에 놀러 나가면 풍광에 감탄했으며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았다.


사실 지난 반년 간 대부분의 시간들을 나는 누워있거나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보냈다. 기운이 없어서.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거나 할 때는 웃고 떠들며 멀쩡히 시간을 보냈고, 피로감이 몰려와도 몇 시간 정도는 커피 한 잔의 도움이면 해결 가능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사실하지 못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는 것 외에는

나는 누가 봐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의사를 제외한 누구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여전히 외향적이며 밝은 성격의 사람이다.


이런 우울증도 있다.


나는 이걸 말하고 싶다.

단순히 우울감을 느끼고 울고 슬퍼하고 하는 것 만이 우울증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우울증의 증상은 여러 가지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처럼 우울증으로 신체적 통증이 생길 수도 있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까지 무거운 피로감이 몸을 짓누를 수도 있다. 이상하게 일에 집중이 안 되고 해야 할 일도 종종 잊으며, 작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도 아주 큰 결심과 노력이 필요한 이 상태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서 나는 지난 반년 간 나 자신을 게으르고 의지박약이며 어떤 생산성도 없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어딘가에서 내 소개를 해야 할 때가 오면 말문이 막히는 이 상태가 너무 싫었지만 자력으로 벗어나기에는 내 몸은 항상 무거웠고 정신은 피로했다.


마침내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것이 병이고,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게으르고 의지박약인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병을 가진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좀 살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내원하고, 약도 복용하고, 매일 나의 상태도 기록해두며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도 절박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리고 치료의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조금씩 보통 사람들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그저 질병이어서 기쁘다. 그래서, 말하자면-


아, 우울증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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