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 좋기로 유명한 대한민국, 하지만 과연 모두가 안전한 걸까?
언젠가 남자친구와 우리는 과연 미래 어떤 시점에는 어딘가에 정착을 하게 될까? 하게 된다면 어디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사실 둘 다 도시보다는 산과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는 것'이 어찌 보면 인생의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제주도가 좋겠다고 했다. 바다도 있고, 경치도 좋고, 산도 있고 오름도 있는 곳. 제주도는 남자친구가 아주 좋아하는 장소이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문제는, 내가 '도시를 떠나는 것'에는 뜻이 있지만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에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몇 년쯤 살아보는 것은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스페인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도 살아보고 싶고, 동남아 어느 휴양지 같은 곳에서도 살아보고 싶고,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독일의 시골마을에서 유학생활을 했을 때도,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의 첫 반응은 조금 부정적이었다. "저는 일단 한국에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는 그 말에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의 이유는 한국의 치안이었다.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나라가 어디 있겠냐고, 일단은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냐는 말. 실제 통계로도 얼마간 증명된 대한민국의 치안 레벨이기에 이건 충분히 이해 가능한 포인트였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한국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는 아니었다. 통계적 수치들을 조금 밀어놓고, 아마도 그가 느끼는 치안과 내가 느끼는 치안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나의 성별이 다른 만큼.
나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스토킹 여러 번에 데이트폭력도 당해봤으며 몰카 피해와 강간미수,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하며 살아왔다. 나열하다 보니 나도 놀라울 정도인데, 이 중에 내가 경찰에 신고한 것은 딱 세 번. 가해자가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받거나 잡힌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어차피 신고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식의 학습된 무기력을 쌓아왔고, 그런 내가 볼 때 한국의 치안을 논할 때 나오는 범죄율이 얼마나 정확할 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편이다. 나처럼 피해를 입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매일같이 뉴스에 나오는 성범죄들의 형량은 기가 차도록 낮고, 피해자들이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거쳐 가해자를 재판장에까지 세운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 무력감은 커져간다.
나에게 한국은 특별히 안전한 나라는 아니었다. 성별을 떠나서 발생하는 절도나 사기 같은 범죄도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범죄들의 대부분은 내가 남성이었다면 아마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2016년부터 2020년 초까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곳에 살면서 유럽의 주변 나라들도 몇 군데 다녀봤는데,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이렇게 다섯 나라에 다녀왔다.
나의 4년이 채 안 되는 외국 생활이 어떤 유의미한 통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에 성추행을 두 번 당했고, 스토킹 한 번과 성희롱 한 번을 당했다. 한 번의 성추행은 경찰에 알렸고, 법적인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같은 과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 경찰이 학교로 찾아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담당교수가 그 자리에 동석했으며 나와 가해자를 분리할 방안을 (나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전 학과에 적용했다. 직접적인 물리적 증거가 없어 바로 처벌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경찰에 기록은 남을 것이며 추후 그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의미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일이 파티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가 술에 취해있었다는 사실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 학기에 다른 과로 전과했다.
독일에서 내가 성추행 피해사실을 말했을 때 주변의 대처는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나는 범죄 피해를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법적 보호나 혹은 인도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나에게 한국보다 조금 더 안전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뭐, 독일에서의 경험까지 갈 것도 없다 사실은.
내 남자친구는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트라우마로 인해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지도 않고, 저층 건물에 사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카메라 셔터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나는 아직도 창밖의 누군가가 침입하거나 나를 훔쳐볼 수 있는 저층 건물에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집을 구할 때는 근방에 CCTV는 설치되어있는지, 큰길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따지며, 이사 간 집에는 사비로라도 방범창을 설치한다.
이런 경험들을 설명하자 남자친구는 본인은 생각해보지 못 한 부분이라고, 젠더에 따라 체감하는 안전함의 정도가 다를 수 있겠다며 많이 힘들었겠다는 위로를 덧붙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두가 안전할 수 있고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사회이다. 성평등이라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라기보다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된다면 그것도 성평등을 이루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