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따라간다는 것에 대하여

신념을 세우고 관철하는 사람, 그런 이가 되기를 나는 열망한다.

by 강승훈

“나는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Ich wollte ja nichts als das zu leben versuchen, was von selbst aus mir heraus wollte. Warum war das so sehr schwer?)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원제 Demian, 1919)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만약 정말 저 하늘 위에 초월적인 누군가가 있다면 알려주겠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학창 시절 풀던 시험지나 문제집 뒤에 항상 끼워져 있던 정답지와 해설지는 이제 주어지지 않는 지금, 나는 방황하고 있다. 십대 시절,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당연히 학교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진리로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학생 시절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이 고뇌, 이를 맞이할 준비가 나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에 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 어느 순간부터 날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사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나는 원하는 것이 있었다. 내 목표라고, 꿈이라고 노트에, 책상에, 벽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에 잔뜩 끄적이며 폼을 잡아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것을 좇다가 중간에 마주한 시련 앞에서 진득하지 못하게 그만두기 일쑤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둘 때의 마음은 항상 같았다. ‘아니야, 이건 나와 맞지 않는 옷이었어.’ 간절히 소망했던 외국어고등학교에 어렵게 입학한 뒤, 부모님께 간청하여 마침내 그곳을 벗어나 일반 사립 남자고등학교로 전학했을 때가 있었다. 외무 영사직 공부를 4년이나 하다가 경찰간부 시험으로 공부 방향을 바꾼 때가 있었다. 공무원 공부를 2년 더 하다가 아예 포기하고 취업을 결심한 때가 있었다.

결국 아내를 따라 폴란드라는 유럽 땅에서 취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시 나는 스스로 정한 목표를 포기할 때마다 확신이 있었다. ‘이 길은 아니라고.’ 그 숱한 좌절과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압도되고, 다시 힘을 내어보기를 수십 번. 그 반복에 지쳐버린 뒤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안 되면 되는 것을 하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미련하게 굴지 말자.

그렇게 나는 이십 대의 꿈을 접어두고 지금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직 삼십 대 초반. 모자란 나를 받아준 감사한 회사를 다니며, 하루하루 피곤에 찌들고 주눅 든 자신을 발견한다. 일을 배워가고 있는 지금, 매일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모자라고 부족한지 알아가고 있다.

이런 무거운 생활 속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 문득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게 되었다. 첫 아이가 생길 때처럼, 두렵고도 설렌다. 가슴이 뛰면서도 걱정부터 앞선다. 그 일이 내 천직일지도 모른다는 지금의 생각, 솔직히 나 믿을 수 있을까? 막상 그 꿈을 좇겠다고 지금 내가 다니는 이 회사에서 나에게 준 기회를 포기한다면, 이 갈대 같은 내 마음은 미련의 실오라기로 한 땀 한 땀 후회라는 옷을 짓겠지.

미련하게 굴지 않겠다던 마음으로 포기했더니, 미련만 남는구나. 맞지 않는 옷이라며 벗어던져 버렸더니, 갈아입을 옷은 그저 후회라는 옷뿐이더라. ‘무엇 하나 진득하지 못했다’는 내 아내의 말이 내 가슴을 왜 이렇게 아프게 할까.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좀 더 버텼어야 했을까? 공무원 공부를 너무 대충했었던 걸까? 좀 더, 그래, 그때 좀 더 했으면 말이야.

아내에게 위로받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지금 당장의 고통에서 도망치려는 비겁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진득해지는 것이 정답일까. 그저 고요한 강물처럼 묵묵히, 그리고 꾸준하게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걸까. 안 되는 것은 될 때까지 안 했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 꿈이라는 것을 좇아 내 자아실현을 위해 어떤 시련에도 맞서겠다는 결심을 세운 것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의 고통이 버거워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는 것일까? 무엇 하나 내 마음조차 믿지 못하는 지금, 마음은 왜 이리도 아플까.

왜 지금 주어진 기회를 감사히 여기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기회를 놓아버리려고 하는가? 시련이 어려워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내 가치를, 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인가? 단순히 도망치는 병이 있어서 도망칠 이유를 만드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 나에게 맞는 중요한 길이 있는데, 내가 단순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일까.

누군가 무엇이 내게 행복으로 가는 길인지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오직 참고 인내하면 될 터인데. 마음껏 내가 원하는 것을 좇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가 버렸다. 20대 중후반, 나에게는 분명 기회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나는 어중간했고, 그 결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어중간한 삶을 살고 있다. 노는 것은 아니지만, 꽤 고군분투는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력을 쏟는 것도 아니고 망설이고 있는 놈.

그래, 언제까지고 나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놈이다. 결단이 없는 놈이고. 괴롭다. 확신이 없다는 것, 방황하고 있다는 것.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감히 주변사람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아내를 원망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분명 나는 그때 내 자유의지로, 내 확신으로 지금의 아내를 선택했다.

공부에 혼을 쏟아도 모자랐던 이십 대 시절, 아내와 연애가 하고 싶었다. 격렬히 사랑이 하고 싶었다. 내게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의심 없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나는 내 사랑에 대해 확신이 있고, 그녀가 주는 사랑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분명 이는 내 인생의 업적이다. 누구에게도 당당한 사랑을 한다는 것. 나의 긍지이자 자랑이다. 그런데 이것을 원망한다고? 치기어리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사실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도,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도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까. 내가 나를 의심하며 가엾게 여기고 있는 만큼, 이런 나를 잡아준 그 손에 대해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야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남자의 인생이란 것이 무엇일까. 나를 잡아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 앞에서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안 되면 되게 하라.” 그 말을 자신 있게 내뱉는 사람이 존경스럽다. 그 기백,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도 ‘다시 해보면 다를 것’이라는 마음.
“안 되면 되는 것을 하라.” 그 말을 자신 있게 내뱉는 사람도 감탄스럽다. 그 용기,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도 다른 분야에서는 다를 것이라는 마음.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 나는 ‘안 되면’이라는 이 가정법 뒤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되게 하라’와 ‘되는 것을 하라’는 그 두 길 가운데 넘어져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서 없이 휘갈겨진 이 글처럼, 너무 많은 생각들이 마치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이 마음에.


-끝-


귀하의 귀한 시간을 들여 관심있게 제 글을 읽어주신 점,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사랑스런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