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열고, 마음을 주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물건이 풍족하다고 하니, 높아진 삶의 질에 따라 정신도 가장 만족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수도 없이 많은 정신병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쉽게 들어볼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풍족해진 물건을 누리면서 사는 삶 속에서도 마음은 왜 자꾸 아플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면 이런 물질적 풍요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 정신적 만족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마음의 병의 정신의학적인 정의는 개별적인 그 증상 및 원인에 따라 확립되지만, 사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 증상이,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생활 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이다. 특정 인간이 타인이 만들거나 규정한 무엇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아픔의 원인은 타인이다. 인간에 의해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들에게 받은 상처, 이로 인해 인간이 인간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런 마음의 상처의 치유는, 인간에 의해서 치유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이 사익에 의거하여, 서로를 살육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된 전쟁터에서 인간에게 받은 정신적인 고통은, 인간이 사랑과 자비에 의거하여 서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되는 무엇인가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 인간이 형성한 사회의 규칙과 질서, 그리고 각 개별적인 인간의 기대를 준수하고 만족시키기가 어려워 이에 적응을 못하는 모습은, 특별히 그 환자에게 해당 규칙과 질서의 준수, 그리고 요구사항의 이행을 철회하고, 관용과 자비로 보듬어주고 여유를 주며, 관심과 도움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안심과 안정을 주는 방식을 통해 진정되고 개선될 수 있다. 결국 해법은 자비와 사랑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이 인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해법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해결책으로 바로 직행하기 전에, 해당 방식에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것부터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나는 이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자신의 분수에 넘치게 무엇인가를 탐하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를 참고하여, 내가 생각하는 욕심이란,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궁극적으로 그 당사자에게 만족보다는 고통을 더 크게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추구하여 진정한 환희를 느끼고 자아실현을 이룩하게 된다면, 이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공허할 뿐인 목표, 그것을 추구하느라 이미 가진 혹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던 수많은 축복을 놓쳐야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애석하게도 이 욕심을 추구하느라 많은 인간에게는 여유가 없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기에 바쁘다. 고통받는 타인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기는커녕, 사익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자아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욕심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도하고 살아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획일화된 기준이 현 세대에 주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가치가 있고 다양한 목표설정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이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그 환희에 도달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 그리고 각기 다른 가치추구가, 서로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 세대는,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이 대량생산 되어 소비되듯 하나의 가치관이 생산되어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모두가 그것에 동조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퍼져 모두의 가치관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물질이다. 작금의 세상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모든 경우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사랑받고 물질은 인간에게 유용하고자 존재하는데, 물질이 사랑을 받고 인간이 물질에게 유용하고자 존재하게 되니, 어찌 세상이 혼란과 도탄에 빠지지 않겠는가.
이런 ‘물질’이라는 획일적인 가치관이 공산품마냥 대량으로 확산되어버리니, 마침내 ‘비교’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너도 나도 중시하는 것이 물질이다. 그러므로 누가 얼마나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 육체적인 안락을 누릴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인간의 존엄이 결정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가치있고 도덕적 일을 하느냐보다 지금 내가 얼마받고 일하느냐, 혹은 얼마의 매출을 창출하느냐가 한 사람의 입지를 형성한다. 세계일주를 하며 무료의료봉사를 하는 저명한 의사는 존경받겠지만, 그보다는 모두 악덕해도 성공한 사업자의 삶을 더 동경할 것이며, 그와 같이 되고싶어 한다. 현 세대에서, 전자는 멍청한 사회부적응자고 후자는 노련한 승리자다.
무한한 정신적인 만족을 이룰 수 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끝없는 사상의 탐구, 내면의 수련, 외부의 유혹과 다툼 등을 통해 마침내 그 목표를 이룬 석가모니를 생각해보자. 그는 부와 명예, 지위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모든 것이 불안정하기를, 마치 바람 앞의 등불같은 것일 뿐, 이런 허무하고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공허에 다다른 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현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의 바람대로 마침내 ‘열반’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감히 성자를 모독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지만, 개인적 소견으로, 부처가 물질만능의 현 시대에 태어났다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회가 강제로 주입하는 획일화된 가치관과 본연의 영혼이 가진 그 강인하고 성스러운 가치관의 충돌에 못이겨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마치 절대 멈출 수 없는 물체가 절대 움직이지 않는 물체와 충돌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부처가 살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적어도 물질을 버리고 진리를 설파한 그를 존경했다. 현 세대의 관점에서 그를 보면, 아비의 왕국이라는 물질적 풍요를 지키고 후대에 계승해야할 책임을 무책임하게 저버린 한 가문의 외동아들이며, 가출하더니 맨날 다른 집 가서 밥 빌어먹고 노숙하는 한량이고, 갑자기 득도했다고 사람들 불러모으더니 현실과 동떨어진,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만 늘어놓는 사회부적응자다. 하등 생산력 없고 남자구실 못하는, 언제 철들지 걱정스러운 패배자다.
앞서 언급한 ‘비교’라는 것이 얼마나 어마무시한 것인지 살펴보자. 한편, 불공정한 대우는 인간의 원초적인 분노를 자아낸다. 예를 들어, 흔히 아이가 ‘엄마는 왜 나의 형제에게만 무엇을 해주고, 나는 그에 걸맞은 무엇인가를 주지 않는가?’라며 따져 묻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원초적 감정이다. 조금 과장해서,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때, 물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분배될 때,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능력에 따라 생산을 하여, 이것을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체험해왔다. 그렇다면 불평등하게 분배될 수밖에 없는 물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의식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누군가는 항상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가 양산하는 이러한 분노로 인해, 돈이 없으면 느껴야 되는 감정은 곧 비교적 풍족한 누군가와 대비되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비참함이다. 생존 전문가 베어 그릴스처럼 야생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잡아먹으며 노숙하는 것보다야 훨씬 풍족한 삶을 살겠지만, 이 비교로 인해 품은 분노가 비교적 가난한 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인간의 존엄성조차 상실한 가련한 인간으로 그리게 만들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표출되어 외부의 무엇인가를 파괴하거나 잠재되어 내부의 자신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물질이 풍부한 이들은 비교에서 자유로운가? 물질을 효율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무리를 형성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지 오래고, 조직에는 항상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있다. 한 무리의 정점에 있는 이들은 분명 평균적 삶보다 월등히 부유할테지만, 앞서 말한 ‘비교’라는 것이 가능해지고 심화되는 지금,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무리군끼리 비교하며 열등의식에 의해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기득권이 위협받으면 어떤 위험도 서슴치 않게 된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인간도, 어떤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조직적인 살육, 전쟁도 일어나니, 이 전쟁이야 말로 영토나 재화라는 물질을 위해 인간의 목숨을 활용하는, 물질이 사랑받고 인간이 유용하게 이용될 것을 장려하는 현상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혼란과 도탄의 정점이다.
우리가 지금,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이유를 살펴보았다. 즉, 사람이 욕심에 허덕이게 된 원인을 이해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비롯한 타인을 파멸시키는지 고찰해보았다. 원인을 이해하였으므로, 결론을 내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이 물질에 대한 집작을 버리고, 비교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유를 가지고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것, 연민과 동정을 가지고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실현되어야 한다. 여유를 가짐으로써, 주어진 가치관이 아닌, 필요한 가치관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인간에게 상처를 받은 인간이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복될 때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싸움에서 수없이 많은 실패를 할 것이다. 하지만, 연민과 동정 속에서 우리가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거듭되는 실패에도 다시 시도할 수 있게 주어지는 기회가 주어질 때, 그들은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상처받은 마음은 누군가가 내밀어주는 마음으로 치유되는 것다. 누구에게나 누군가가 필요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랑이니까, 그것이 만병통치약이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물질보다 추구해야할 무엇인가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귀하께서 시간과 관심으로 읽어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