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충고

by 교수 할배

"장사판 정치판 종교판 학문판, 문인들이여 이 판에는 발을 들이지 마라."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 초청강연에서 그렇게 강조하였다.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 청중들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어서 손을 들었다. "문인들에게 학자판에는 가지 마라고 충고하셨는데, 학자판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문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로시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학자가 문인 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는 이론을 좋아하고 잘 따지며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학자처럼 사회생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 문학강의를 듣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의 충고를 들으니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는 싹이 뿌리째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문인의 길에 대한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한 가지 더 여쭈었다. "학자가 문인이 되려면 어떤 소양이 필요합니까?" 그분은 차분한 어조로 한 가지를 강조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이처럼, 주변에서 보고 듣는 모든 일에 호기심이 있어야 하며, 작은 거라도 아끼는 사랑이 있어야 하며, 그리움을 가져야 문인이 될 수 있다.


이론 좋아하고 따지고 평가하는 성향 때문에 학자는 문학을 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서두에 언급한 네 가지 판 중에 학자판과 가까운 교사들의 세계를 살펴보자. 교사들은 모의 수업, 탐구계획서 발표, 토론, 토의 등을 주관한다. 이 중 모의 수업이 합평과 가장 비슷하게 느껴진다. 발표자가 있고, 발표내용에 대하여 동료들과 지도교사가 의견을 낸다. 교사 후보자인 학생(교생)이 15분가량의 수업을 진행한 후에, 반원과 지도교사들이 함께 모여 수업에 대하여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 평가회는 공식 행사와 같은 분위기로 시작한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르면서 반원들이 사무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마지막에 담임교사가 조언을 한다. 교생에게 수업하느라 수고했다고 시작하지만 잘 한 점은 적게 말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빙산의 가라앉은 부분처럼 많이 저적 한다. 교사는 이론에 근거하여 수정하고 보완할 부분을 조언한다. 조언을 하면 교생의 마음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유머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경우는 드물다.


문인들은 합평을 어떤 형태로 진행할까? 내가 수강 중인 수필창작반의 합평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다. 선생님은 기성 작가와 대회 입상자의 수필을 소개하는데, 그 글이 우수한 면을 설명한다. 주제를 표현하는 소재의 선정이 탁월하다. 상황을 묘사하는 어휘의 선택에 감탄한다 등의 근거를 댄다. 이어서 함께 수강하는 반원들이 쓴 글을 함께 평가(합평)한다. 먼저 글쓴이가 자신의 글을 낭독한다. 반원들이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며 글쓴이에게 조언을 한다. 글쓴이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선생님이 그 글에 대하여 전문가로서 조언을 한다. 문법적인 요소인 의존명사, 주격조사와 보조사, 문장기호 등의 적절한 사용법과, 수필의 특징인 주술호응, 수미상관 등을 언급한다. 원리 및 적용 사례를 인용하여 조언하므로 수강생들이 쉽게 이해한다. 동료들과 선생님의 피드백으로 인하여 글의 완성도가 향상되고 글쓴이의 자기 성찰과 성장에 도움이 된다.


이처럼 문학활동에는 반드시 평가 활동을 포함한다. 효율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글의 내용을 관련된 이론에 근거하여 분석한 후에 소통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을 '따지기'로 볼 수 있다. 문인들도 이미 이론 좋아하고, 잘 따지며, 평가하는데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다. 문인들의 합평과 학자들의 평가회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왜 그 시인은 문인들에게, 학자판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고 한 걸까? 그 이유를 추정해 보면, 문인들은 '사람의 마음'에 관심이 있고 학자들은 '글의 흐름'에 관심이 있어서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문인의 합평은 학자의 합평과 다른 면이 있다. 내가 참석하는 수필창작반 반원들은 의견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좋은 부분을 칭찬한다. 때로는 유머를 사용하여 분위기 전체를 밝게 만든다. 거의 모두 긍정적으로 피드백을 준다.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빙산의 떠오른 부분처럼 조금만 언급한다. 선생님은 매우 정성스럽게 접근한다. 전문적인 조언을 하면서도 듣기에 좋게 말하며, 이론에 터하여 도움이 되는 제언을 한다. 글의 품위를 높일 수 있도록 종종 문장 전체를 바꾸어서 조언하기도 한다. 보완할 부분에 대하여 대안을 두 개 정도 제시하여 글의 주인이 선택하도록 배려하는 부분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문학은 시인이 말한 대로 호기심, 사랑, 그리움 등을 통해 '진선미'를 추구한다고 느껴진다. 특히 사람들의 정신문화를 고양시키는데 중점을 두는 듯하다. 반면에 학문은 비판적 사고, 합리성, 객관성, 창의력 등을 중시하므로 진리추구의 비중이 높다. 진리추구의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에 대한 배려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다만 학문에서 중시하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은 문학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하다. 학문의 벌판에서 생활한 세월에 비례하여 문학에서 중요시하는 부분에 둔감해졌나 보다. 문인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인이 강조한 대로 어린이처럼 되는 연습을 해야 하겠다. 특히 합평에서 의견을 말할 때, 동료들과 선생님이 하는 걸 잘 보고 배우면 문인다움을 체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 그 시인을 학자라고 생각하며 그의 말을 이론에 근거하여 따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문인의 길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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