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바지랑대에 관한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어릴 적 시골집에는 마루 기둥과 우물가 감나무를 이어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빨래의 수가 많거나 무거운 빨래를 널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줄이 축 늘어져 빨래가 땅바닥에 끌렸다. 그러기 전에 어머니는 빨랫줄 가운데에 바지랑대를 곧추세워 놓았다. 바지랑대는 모든 빨래가 마를 때까지 버티고 배겨냈다. 바지랑대에는 어머니가 걸어온 길이 아로새겨져 있다.
실바람에도 흔들렸을 바지랑대에 큰 빨래를 널었던 사람은, 외할아버지셨다. 일본 강점기에 태어난 어머니가 일곱 살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세 살 터울의 언니, 오빠와 함께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해 제주도로 가면서 자녀를 처가 식구에게 맡겼다. 언니는 큰 이모가, 오빠는 둘째 이모가, 어머니는 외삼촌이 맡았다. 보릿고개가 높아서 가족이 많으면 힘든 시절이라 그랬는지, 세 남매는 한 곳에 길게 머물지 못하고, 꿀벌 마냥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다. 어머니는 마음씨가 곱고 부지런하였기에, 남의 집 살이와 같은 시절을 거쳤어도, 친척들과 사이가 좋았다. 스무 살에 결혼할 때까지 그렇게 생활하셨다.
결혼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하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결혼하니 할머니가 무겁고 얼음장 같은 빨래를 얹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부모 없이 자랐다는 사실 때문인지 은연중에 낮춰보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안일 논밭 일 모두, 자녀가 있는 큰 며느리보다 둘째인 어머니에게 더 시켰다. 심지어 첫 아이를 나은 어머니가 몸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밭으로 보내셨다. 시댁 어른들에 대한 여러 가지 서운한 마음이 쌓였는지, 어머니는 ‘느그집(시댁을 그렇게 부름) 식구가 꿈에 보이면 그날은 종일 재수가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셨다.
하지만 친정이나 시댁의 누구도 아버지가 가져온 빨래에 비할 수 없다. 2녀 2남의 막내인 아버지는 책임감보다는 즐거움을 좇으며 젊은 날을 보냈다. 가장이 되어서도 같은 행동을 이어갔다. 아버지 빨래는 많고, 무겁고, 찌들어서, 자세히 보며 오래 빨아야 했다. 게다가 여러 날 동안 말려야 해서 바지랑대는 그 기간만큼이나 몸서리쳤다. 그리하여 바지랑대가 날이 갈수록 빛이 바래고 수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자식들도 크면서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장남은 공터에서 파는 약장수 약을, 어머니가 사줄 때까지 졸랐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서운하게 대하면, 동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차남은 왼쪽 허벅지에 종기가 생겨서 6개월 정도를 이웃 마을 약방에 입원하여 치료받았다. 어머니는 집안 일로 바빠서 지인에게 아들 간호를 부탁하고, 이삼일에 한 번씩 음식을 들고 십오 리 길을 걸어서 약방에 다니셨다. 막내 둘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명품을 좋아했다. 옷, 신발, 가방을 모두 외국 명품으로 갖추고 싶어 했다. 막내들 요구를 들어주느라 어머니는 마른 수건을 쥐어짜면서 살았다. 이따금 바지랑대가 쉴 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찾아왔다. 그럴 때면, 자식들 중 누군가가 마당에서 놀다가 바지랑대를 건드려 넘어뜨렸다. 넘어질 때마다 바지랑대는 엄청 아팠을 터인데, 잠깐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울며 잠들었다.
흐린 날이 지나면 맑은 날이 오는 것처럼, 가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바지랑대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었다. 자식 중에는 셋째가 그랬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은 어느 것이나 군말하지 않고 잘 들었다. 명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도 1등으로 입학하였다.
외할아버지도 노년에는 어머니에게 잘하셨다. 제주도에서 재혼하고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향하신 외할아버지는 막내딸 사는 모습에 마음이 쓰였는지 어머니에게 논을 사 주셨다. 40리 정도 떨어진 읍내에 사셨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택시를 보내기도 하셨다. 손자들에게도 선물을 많이 하셨다. 값나가는 책가방, 가죽 축구공, 일제 시계는 70년대 초의 시골 마을을 소문으로 떠들썩하게 만드는 물품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도 바지랑대가 짊어질 무게를 덜어주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집에서 몇 년을 함께 사셨는데, 막내며느리인 어머니에게 당신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제삿날에는 큰집 가족, 고모네 가족이 모두 막내 집에 모였다. 어머니는 그 일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셨고, 50년 정도 모신 후, 종친회 제사에 합사하였다.
아버지도 언제부터인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자녀의 진학, 이사 등 집에서 결정할 일이 생기면 어머니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였다. 담배는 끊었고, 술을 마시지 않고 귀가하는 날이 늘었으며, 가족들에게 큰 소리 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어느 날은 식구들을 모아놓고 집안의 내력과 자녀들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뒤늦게 분 남쪽 바람이었지만, 아버지는 인생의 늦가을에 바지랑대 위를 맴돌다 앉았다를 거듭하는 잠자리처럼 사셨다. 어머니가, ‘이상한 일도 다 있네, 느그집 식구들이 꿈에 보였는데도 오늘은 궂은일이 없었다’라고 말씀하신 건 이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바지랑대로 산 기나긴 세월, 어머니는 어떻게 배겨냈을까. 어린 시절 불어온 태풍, 얼마나 휘청거리고 흐느꼈을까. 결혼 초기의 얼음 바람, 얼마나 와들와들 떨었을까. 겨울이 길고 봄이 짧았던 인생, 기댈 품 하나 없이---.
나의 자녀들도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애들이 배우자와 함께 할머니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면 어떨까. 할머니의 삶은 가장으로서의 바지랑대가 무겁고 흔들릴 때, 넘어지지 않게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번 명절에는 다 함께 할머니 댁에서 하루 더 지내자고 권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