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이야기
봉중근 감독이 만든 영화 ‘패러사이트’는 201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였다. 2020년에는 아카데미상, 골든글러브상 등 세계적인 영화제를 휩쓸며 한국 영화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부잣집에 기생하여 가난한 설움을 잊고 호사스럽게 살았던 꿈같은 이야기는 지구촌 사람들은 열광시켰다.
어린 시절 패러사이트는 약한 나를 괴롭혔다. 언제부턴가 밤이면 뒤가 가려웠다. 뭔가 꼬물 거리기도 하였다. 참다못해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잡히는 게 있었다. 굵직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회충이 꿈틀거리며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잡혀 나왔다. 나는 기겁하며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용감했던 형은 얼른 종이에 싸서 마당으로 던져버렸다. 회충 알이 내 뱃속에서 성충이 되어 나온 것이다. 내가 먹은 음식을 이것들이 먹고 자랐다니 고약한 놈들이다. 그러나 내장 벽을 물어뜯어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순순히 나와 주었던 것에 감사하였다.
다음날 밤엔 목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무엇인지 목구멍 속을 오르내렸다. 손가락에 잡힐 듯 말 듯하다가 결국은 내 손에 잡혔다. 뽀얗게 살이 오른 회충이 딸려 나왔다. 온 식구들은 어제처럼 또 놀랐다. 회충이 나의 기도를 막았다면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다. 혈관을 뚫고 들어가 핏줄을 막았다면 나는 식물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식도에서만 놀다가 잡혀 나왔으니 나는 운이 좋았다.
아버지는 곧바로 구충약을 구입해 오셨다. 다음날 변을 보니 회충들이 구물거리며 수 십 마리가 나왔다. 저렇게 많은 기생충들이 내 뱃속에 있었다니 내가 사람이 아닌 거 같았다. 개나 돼지에게나 있을법한 일을 내가 겪다니 나는 며칠 동안 충격에 빠졌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나중에 누구에게도 그 일은 얘기하지 않았다.
성인이 돼서야 안 일이지만, ‘1960년대 전 국민의 90%가 기생충 환자였다’고 한다. 그래도 나정도 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5남 2녀의 아이들이 살고 있던 시골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법석거렸다. 나는 사랑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긴 담뱃대에 끼인 담배 진을 털어내시느라 아침 일찍부터 재떨이에 땅땅거리며 피시는 담배연기를 맡으며 잠이 깨었고, 밤에도 담배연기 속에서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머슴 아저씨는 쇠죽을 끓여야 하므로 작두에 볏짚을 썰고 호박이나 고구마, 무시래기 등을 함께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지핀다. 어머니는 안채 아궁이 재를 긁어내어 뒷간에 버리고 아침밥을 준비하신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농사일이나 잔심부름으로 모두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소 풀도 베어야 하고 돼지 먹이도 줘야 한다. 놉을 얻어 일할 때면 주조장에서 막걸리를 사 오고, 호롱 불에 사용할 석유도 받아 와야 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수영하며 더위를 식히는데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말린 쑥을 비벼 귀를 막았고, 말린 것이 없으면 길가에 생 쑥이라도 뜯어서 막았다. 그것도 싫으면 그냥 침을 양쪽 귓구멍에 묻히고 물에 뛰어 들어가면 그만 이였다. 벌레에 물려 가려우면 침을 발랐고, 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면 침 뱉고 하늘을 쳐다보면 낫는다고 하였다.
아마도 손 씻기는 아침 세수할 때 한 번이면 하루 종일 그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추운 날 아침 우물에서 찬물로 세수하면 문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얼어붙어 얼굴을 씻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겨울에는 손등이 갈라지고 터서 피가 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칫솔질은 학교에서 검사하는 날에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목욕탕이 없던 시절이니 여름철 물놀이할 때 아니면 몸을 씻을 수가 없었다.
온 식구들의 옷은 어머니 혼자서 빨아내셨다. 빨랫감이 많을 때는 머리에 이고 한참을 걸어 냇물까지 다니셨다. 겨울이면 눈길에 냇가 얼음을 깨고 방망이질을 하셨다. 옆집 담 쪽으로는 두레박을 사용하는 우물이 있어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르고 날이 가물면 바닥이 말랐다. 이웃집의 생활용수가 다시 스며들어 비위생적이어서 식수로는 쓰지 못하고 세수할 때나 세탁할 때, 마당에 물 뿌릴 때 등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사랑채 옆 창고 건물에는 화장실이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재래식이다. 다른 하나는 아궁이에서 나온 나뭇재에 삽으로 버무려 처리하는 잿간이었다. 어른들과 남자들은 주로 재래식을 사용하였으나 화장실은 무섭고 불결하여 정말 싫었다. 자다가 일을 보려면 밤에는 어두워 화장실까지는 갈 수가 없어 마당 구석 한 곳에 슬쩍 일을 보고 나면 다음날 아침 어른들이 삽으로 치워주셨다. 그런 모습은 내가 봐도 불결하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당은 질컥거리고 모든 것들이 범벅이 된 오염수에 축사 냄새까지 고약했다.
명절 때나 할아버지 생신날에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먹다 보면 목에서 신트림이 올라오고 다음날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아침이면 땅에 떨어진 감을 주어 먹고, 흙 묻은 무 뿌리를 이빨로 대충 벗겨내어 먹었고,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었고, 논두렁 콩을 깡통에 구워 먹는 등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마치 야생동물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날것, 익힌 것 가리지 않고 손으로 집어먹었다.
오늘날 OECD 회원국이며 세계경제 10위권의 경제대국 국민으로서 기생충에 시달렸던 일이 믿기 어려우나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이다. 과거 식단의 대부분이 인분 퇴비를 주어 기른 곡물과 채소여서 회충의 생활사가 유지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음식도 깨끗한 물에 충분히 씻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니고 손도 씻지 않으니 회충 알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체 국민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기생충이 2% 수준으로 급격하게 감소됐다. 기생충이 토양을 매개로 인체에 들어오는데 인분을 사용하지 않는 농법이 등장함에 따라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 기생충이 약국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일반 구충제에 잘 죽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회충에게 혼쭐이 난 후로 나는 손 씻기가 습관화되었고, 날것을 먹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화장실에서도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하였다.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던 버릇도 고쳤다.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손 씻기와 마스크 쓰기 그리고 거리 두기 잘하라고 TV만 틀면 나온다. 난 어릴 적부터 이미 몸에 밴 일 들이다.
봉중근의 패러사이트에서 가짜 가정교사 ‘제시카’와 가족들의 기생이 들통 나 비극을 맞았다. 인체에 기생하는 벌레들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토양 속 지렁이와 함께 농토가 비옥해지는 방안은 없을까.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님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