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후의 가난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걸러본 일이 있는가.
불과 60년 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때는 코가 문드러져 없어지고 손가락이 잘려나간 나병환자들이 동네에 자주 나타났다. 그들이 논두렁에서 밀을 구워 손가락 없는 손바닥으로 비벼 먹던 모습은 불쌍하기보다 무서웠다. 문둥 병자들은 ‘사람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어린아이들을 잡아간’ 다는 소문도 섬뜩했다.
60년대는 먹을 것이 없던 때이니 농촌에 걸인들이 많았다.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보자기를 둘러쓰고 집집마다 다니며 구겨진 양재기 그릇을 내밀었다. 때로는 없어진 손에 쇠갈고리를 착용한 상이군경도 나타났다. 언젠가는 눈썹이 없던 걸인이 우리 집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음식을 드렸다. 큰형은 “또 오세요”라고 인사하자 "이런 댁은 처음"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여러 차례 하셨다. "갈 곳이 없으니 하룻밤 재워달라"라는 사람도 있었다. 식구들 모두는 못마땅했어도 할아버지는 사랑방을 내어 주셨다.
사람 사는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 남에게 구걸을 해야 한다면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 사회에 있어서는 아니 될 비참한 현실이었고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농민들의 소득도 늘어나고, 생활환경도 좋아져 ‘보릿고개’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겨울 동안 다 먹고 나면 초여름에 보리가 나올 때까지 식량이 없어 고생했다'라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거나,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6월 말 보리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익기도 전에 수확하여 푸른 죽으로 끓여 먹기도 하였다. 요즘 밀은 건강에 좋은 분식이 되었지만 그때는 '국수나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던 것'이 가난의 상징이었다. 수필가 '최재범'은 '보릿고개는 누구를 나무랄 일이 아니다. 전설 속의 고개로 묻어두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망중 무렵 모든 곡식 다 바닥나고/ 해는 길고 보리 모가지는/ 왜 그리 더디나 나오는지/ 보리 모가지 기다리며 눈이 빠지다/ 동밴 보리 목 똑똑 따다/ 솥에다 푹푹 찌고 볶으면/ 파 짝 파 짝 마른단다/ 그걸 도구 통에 콩콩 찧으면/ 보릿잎 보릿대 패지 않은 보리가/ 한꺼번에 찧어졌단다/ 그걸 체에 탁탁 치면/ 푸른 가루가 나온단다/ 그걸로 죽을 쑤면/ 색깔이 포로소롬하고 맛이 고소하다. 김용택 시인의 <푸른 나무 10> 일부이다.
농민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어, 가뭄·홍수에 따라 수확량은 크게 좌우되었다. 어렵게 수확한 쌀을 일본인들이 빼앗아갔으니 배고픈 서러움이 극에 달했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6.25 전쟁 이후에도 가난은 가중되어 UN에서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이 10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하였다. 어떤 외국 기자는 '가망이 없는 나라'라고도 하였다.
농사일로 바쁜 날이면 손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 못 가게 했다. 속담에 '오뉴월에는 부지깽이도 덩달아 뛴다'라고 했지 않았던가. 농사철 이웃집 품팔이를 갈 때면 집에 있던 애들까지 데려와 밥을 먹였다. 아침밥을 거르고 오니 일터에서 오전 새참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새참이 시원찮거나 애를 데려온다고 눈치를 주는 집에는 일을 가지 않았다.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배를 곯아가며 자라야 했다. 가수 '진성'의 노래에서 "얘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가 바로 60년대 배고팠던 참상을 노래한 것이다.
식량문제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에 밥이 없는 아이는 남들이 도시락 먹을 때 운동장에 나가 놀다가 시간이 되면 교실로 돌아왔다. 이처럼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은 옥수수 죽을 주었다. 옥수숫 가루를 끓여 접시에 담아주는 죽은 한숨에 마셔버렸지만 그날은 결석하는 아이도 없었다. 미국 원조물자 가루우유를 배급받아 영양을 보충했다. 많은 아이들이 학비가 없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공부보다 돈벌이가 급하여 서울로 떠나는 애들도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때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학교 주변에 음식점도 없고 구내식당도 없어 양은 도시락은 책 보다 더 소중했다. 어떤 아이는 꽁당 보리밥이 창피하여 애들 볼까 봐 감추면서 얼른 먹어치웠다. 자전거를 타고 자갈길을 덜컹거리며 학교에 도착하면 가방 속의 도시락은 반찬과 뒤섞여 비빔밥이 되었다. 책에까지 반찬 물이 스며들어 냄새가 가시지 않으니 책가방을 아기 다루듯 조심해야 했다.
나는 평생을 농촌 지도직 공무원으로 농민들에게 농사기술을 가르쳤다. 가난에 한이 맺힌 농민들은 자식들에게까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자녀라도 잘 되기를 빌면서 높은 학교에 보내기를 원했다. 농민들은 새로운 품종이나 기술을 쉽게 받아들이질 못하고 남들이 먼저 하면 나중에 따라 하려 하였다. 가족의 생명줄이 달린 농사를 한 해만 실패하면 그 타격은 심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지정하여 새로운 종자나 농사기술을 먼저 해보도록 하였다.
우리는 이제 1인당 GDP가 3만 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쌀을 제외한 옥수수나 밀, 콩 등 우리 소비량의 80%를 외국에서 사들여야 하니 아직도 문제가 심각하다. 북한과 대치 상황인 데다 일본이나 중국이 언제 또 무슨 도발로 우리를 괴롭힐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농경지 면적이 매년 감소하는데다 기후변화 때문에 국가 식량 부족 사태는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 과거처럼 끼니를 굶는 사람은 없어도 농촌에는 노인들뿐이어서 농작업에 나설 사람이 드물다. 누가 뭐래도 나라 곡간에는 식량이 든든하게 채워져야 하며, 해마다 농사는 잘돼야 하는데 농촌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이다.